J에게.
‘젊다’라는 표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쓸 수 있는 표현인지 생각해 본다. 아직 스물넷이고 곧 스물다섯이 되는 나는 밥 먹듯이 ‘이제 다 늙었어~ㅠㅠ’라는 말과 ‘아직 우리 젊어~~~’라는 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지내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장 젊은 날은 수능이 막 끝난 겨울방학이다. 내가 어린지도 젊은지도 몰랐던 날. 갑자기 생긴 자유가 낯설었던 날. 청춘이 마냥 무겁고 막막하게 느껴졌던 날. 스무 살의 나는 인생 처음으로 아주 긴 기간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아주 긴 기간이라고 해봤자 약 2주 정도다….) 집을 떠나서 공주의 사촌 J 집으로 처음 여행이라고 할 만한 여행을 떠났다.
갓 스무 살이 된 두 명이 모이면 무엇을 할까. 밤새도록 술 마시기? 헌팅포차 가기? 복권 사기? 새벽까지 놀다가 해 뜨면 집 들어가기? 지금까지 나열한 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최대의 젊음이자 일탈인데 나와 J는 저 중에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공주에는 술집이 그리 많지 않고, 무엇보다 집에는 삼촌과 숙모가 있기에 밤늦게 들어갈 수도 없고, 우리는 술을 마셔본 적도 마실 줄도 모른다. 술 사주겠다고 불러내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탈을 했다. 그것은 바로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자기. 동물처럼 살기. 내가 눈 뜨는 시간이 곧 아침이요 잠드는 시간이 곧 밤인…. 세상이 만들어 둔 규칙에서 벗어나기.
J보다 먼저 일어나서 거실에 앉아 베란다 밖의 사람들 한번 구경하고, 티브이 위에 앉은 먼지 한번 구경하고, 너무 심심해서 다이어리까지 쓰다 보면 J가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나온다. 나와서는 다시 거실의 소파에 드러눕는다. 거실의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틀고 잠시 빈둥 대다가 잠에서 깬 후에는 J만의 토스트를 만들어준다. 특별한 레시피는 아니지만 J가 만들었기에 J만의 토스트이다. 특징이 있다면 꼭 마지막에 케첩과 머스타드 소스를 뿌린다는 것 정도이다. 토스트를 만들면서 동시에 바나나와 우유를 한대 넣고 갈아서 만든 진짜 리얼 100% 바나나 우유도 만든다. 능숙하게 프라이팬을 잡고 요리를 하는 J가 신기하기만 하다. 스무 살의 나는 정말 온실 속의 화초 그 자체여서 주방에서 요리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엄마가 만들어 둔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정도가 나의 최대 조리였다. 그런 나에게 J는 이미 훌쩍 큰 어른처럼 느껴진다. 물론 평소에도 그랬다는 건 아니다. 토스트를 만들어 줄 때만, 그랬다는 뜻이다.
그렇게 토스트를 먹고 난 후에 어떤 날은 집 근처 공원에 나가 산책을 하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서 송강과 이진욱이 나오는 스위트 홈을 정주행하고(나는 송강파, J는 이진욱 파였다. 지금은 나도 이진욱파다..), 어떤 날은 숙모와 삼촌이 오는 시간에 맞춰 월남쌈을 만들어 대령하기도 했다. 모든 날이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다름 아닌 눈이 펑펑 내린 날이다. 19년을 부산에 살며 눈이라고는 거의 보지 못하며 살았던 나는 눈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찔끔찔끔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르게 내리는 눈, 눈을 아주 크게 뜨고 봐야 겨우 보이는 눈, 새벽 내 눈이 왔다고 해서 나가보면 그새 다 녹아서 물이 되어버린 눈 말고 정말 펑펑 내리는 눈이 보고 싶었다. 온 세상이 하얘지는 걸 보고 싶었다. 20살의 나에게는 그 풍경이 사하라 사막보다 멋있고, 오로라보다 황홀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정말 그 풍경을 봤다. 공주에 가 있는 내내 눈을 입에 달고 살았던 터라 평생 눈을 보고 자란 J도 나만큼이나 눈을 기다렸다. 우리는 항상 자기 전에 내일 날씨를 확인하고 잠에 들었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베란다로 달려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베란다를 보는데 눈이 정말 펑펑- 내리는 것이다. 그냥도 아니고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펑펑 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파트 옥상은 눈에 뒤덮여 하얗고 주차장, 자동차, 나무 모두 눈에 쌓여있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집에서 베란다만 바라보다가 하루가 다 갔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다음 날은 롱패딩을 단단히 챙겨 입고 나가서 눈을 배경으로 사진을 실컷 찍었다. 눈과 J만 있으면 됐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이날 이후로 우리는 많은 여행을 다녔다. 함께일 때도 있었고 다른 사람과 함께일 때도 있었다. 토스트 만들 때만 어른 같았던 J는 취업하고 밤 12시 이전에는 잠에 들어야 하는 어른이 되었고 나는 혼자서 토스트는 물론이고 된장국과 볶음밥 같은 기본적인 요리는 뚝딱 해내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 여행을 물으면 아직도 저 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내가 가장 나태했던 시절.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좋았던 시절. 젊은지도 모르고 어린지도 모른 채로 흘러가 버렸던 시절. 확실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 보고 싶은 풍경은 있었고 나는 그 풍경을 봤다. 그리고 그 풍경을 J와 함께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지나야만 좋은지 아는 것들이 있다. 젊음과 나태한 시간과 모든 처음이 그렇다.
실시간으로 내 눈앞을 지나가고 있는 젊음을 본다. 보다가 괜히 조급해져서는 핸드폰을 들어 J에게 카톡을 보낸다. 이른 시일 내로 보자고. 아직 너와 못다 한 이야기가 많다고.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은 젊음도 우리를 기다려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