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오로지 나만이 존재하는 고독 속 자유에 대하여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20. 감독 셀린 시아마 출연 아델 에넬, 노에미 메를랑, 루아나 바야미, 발레리아 골리노
마지막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아요. 비발디의 사계가 울려 퍼지는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보지 못한 채 무대만을 지켜보는 관객으로서 존재하는 엘로이즈가 있어요. 이 영화는 끊임없이 수동적인 대상에 위치한 것들을 주시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수동을 능동으로 전복시키는 담담하지만 강한 파문을 지닌 대사들을 던지죠.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초상을 그리는 상황에서 마리안느는 엄연히 그림을 그리는 화가, 능동적 인물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의 시선을 연결해줍니다. 그려지는 대상은 사물이 아니라서 화가를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사랑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관찰당하던 입장에서 서로를 마주보게 만드는 말입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어떤 이들은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본 사실에 집중해 그를 질책하거나 이해하려는 의견들이 충돌할 때 엘로이즈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여자가 말했을 수도 있죠. '뒤를 돌아봐요'." 오르페우스의 어리석은 행동을 평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에우리디케의 선택에 대한 고려로 가능성을 열어주는 말입니다.
이 영화의 전개는 마리안느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영화의 도입부 마리안느가 그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림을 비추고 회상이 시작되는 장면이 있고요. 처음 엘로이즈와 만난 장면에서는 마리안느는 오직 절벽과 바다로 달려가는 엘로이즈의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이들이 작별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마리안느만을 직접적으로 다루고요. 이별 이후에 엘로이즈는 첫 번째로 미술관 그림에서 아이와 함께 초상으로 등장해 아직 마리안느를 기억하고 있는 듯한 암시를 던져줍니다. 며칠 후면 이곳을 떠나야 할 마리안느는 일면식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게 될 현실에 처해있는 엘로이즈와 완전히 같은 시선일 수는 없겠죠.
그로 인해 그들은 잠깐 갈등을 빚지만 오히려 그들이 예견된 작별로 달려가면서 아픔을 달래지 못해 발생한 이별의 과정 중 하나로 보입니다. 마리안느의 시선으로 시작된 영화이기에 필연적으로 대상으로 비치는 엘로이즈만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뒤를 돌아봐요"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그녀가 마지막 마리안느와의 작별에서 새하얀 결혼 드레스를 입고 황급히 떠나는 마리안느에게 뒤를 돌아봐요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대사의 함의는 분명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이야기와 접촉돼 있을 겁니다.
마리안느는 작별을 앞두고 엘로이제에게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요."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르페우스의 행동에 "그녀와의 추억을요. 그래서 뒤돌아본 거예요."라고 해석한 마리안느는 뒤돌아보라는 말에 결국 오르페우스와 같이 뒤를 돌아봐요. 그녀와의 추억을 뒤돌아봅니다. 둘은 이렇게 작별합니다. 헤어짐의 아픔은 사그라들었지만 이들은 아직 서로를 기억하고 서로에게 시선을 보냅니다. 마리안느는 계속 엘로이제를 돌아볼 거예요. 엘로이제는 마리안느에게 계속 뒤를 돌아보라고 말을 걸 것입니다. 그들의 선택이고 사랑의 형태라고 생각해요. 이에 대한 결과물은 마리안느가 엘로이제를 기억하며 그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작품이죠.
이 영화에서 사랑과 기억과 시선은 동의어입니다. 오히려 그 이상일 지도요. 첫 장면에서 모델이 된 마리안느를 기억하신가요. 모델을 그리던 화가의 위치에서 모델이 된 위치까지의 마리안느의 변화는 엘로이즈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겠죠. 다른 상황 속에서 비견된 다른 시선에서 출발해 같은 위치의 시선으로 변모된 양상이 영화 곳곳에 빛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르페우스 신화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엘로이제의 새로운 해석으로 인해 이 둘의 사랑은 한때의 선언, 추억, 성장과 원동력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믿어요.
타오르는 엘로이즈를 보던 마리안느와 그런 마리안느를 보며 타오르는 엘로이즈는 그 시점에서 마치 각성한 듯 서로의 사랑을 깨닫고 애정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잘 알게 됐든 엘로이즈가 변했든 간에 둘을 감싸고 있는 정동은 사랑의 형태로 완성되어 갑니다. 초상화에는 점점 불꽃과 같은 존재감과 생명력이 차오르고 이들의 관계도 깊어져 갑니다. 멜로 영화의 강점은 감정을 깊숙하게 들여다본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이뤄질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서로를 갈망하는 굉장히 멜로다운 서사가 훌륭한 연출의 화폭 위에 배우들의 열연으로 그려져 애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탁월했다고 봅니다.
그럼 다시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아요. 비발디의 사계가 울려 퍼지는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보지 못한 채 무대만을 지켜보는 관객으로서 존재하는 엘로이즈가 있어요.
마리안느의 시선에서 바라본 엘로이즈의 줌인 장면을 꽤나 길게 연출해 두었는데요. 거기서 엘로이즈는 무대를 보며 헐떡이며 미소와 눈물을 같이 짓습니다. 음악의 종장에 다다를수록 흥분과 슬픔, 쾌감에 휩싸이는 것 같은 모습이에요. 평화롭고 평등했던 마리안느와의 시간 속에 존재했던 음악을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다시 느낍니다. 저는 엘로이즈가 그때의 해방과 자유를 느꼈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스포트라이트는 오직 무대만을, 어둠으로 잠겨있는 관객석에서 그녀는 음악을 들으며 온전히 과거와 자신에게 잠식되어 눈물과 웃음을 토해냅니다. 하녀인 소피와 귀족인 엘로이즈, 화가인 마리안느가 이룬 평등 속 안락함의 시간에서 튕겨져 나와 엘로이즈는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원하던 사랑을 떠나보낸 일련의 과정을 겪었습ㄴ다. 그런 그녀가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은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결혼식장이 아니라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 곳, 과거의 기억과 시선에 납치당할 수 있는 어둠이 아닐까요. 완전한 자유에는 완벽한 외로움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처럼요.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방랑자> 중에서)
이 영화는 끊임없이 수동적인 대상에 위치한 것들을 주시합니다. 마지막 장면 속 엘로이즈의 자유, 그 외피에는 마리안느의 시선이 가닿아 있어요. 하지만 포착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의 자유는 더욱 슬프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1700년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압이 만연했던 계급사회 시대에 급류와 같은 운명에 속박된 엘로이즈를 바라봐줬던 유일한 사람의 시선이니까요. 사랑의 시선을 보내왔던 마리안느의 시선에 의해 포착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아니까요.
영화 바깥세상에는 마리안느의 시선만이 있는 건 아니죠. 결혼을 강요한 밀라노 어느 곳의 귀족의 시선도 있습니다. 우리는 시선에서 완벽히 도망칠 수 있을까요.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저는 엘로이즈가 결국 끝까지 마리안느를 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들도 같은 어둠에 잠식된 또 다른 시선을 그저 어둠에 놓아두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걱정을 잠시 내려놓은 채 잠시의 자유를, 행복을 만끽하시기를 바라요.
귀엽고 뭉클했던 장면
저는 퀴어 영화에 의식적으로 더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중이지만, 이 영화는 그런 점을 제쳐두고도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하는 여러 의미로 좋은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