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詩와 작별하지 않는 법

by 루 살로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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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너무 기분 좋은 꿈을 꿨다. 꿈속에 한강 작가님이 등장한 것이다. 꿈속에 문인들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아침에 일어나 기분이 꽤 좋았다. 하지만 꿈을 꾼다는 게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꿈을 자주 기억한다는 건 수면의 질이 나쁘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썩 반가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꿈속에서 한강 작가님은 한 라디오 문학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었는데 작가님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품 중 하나가 나의 작품이었다. 꿈이었지만 작가님의 나긋한 음성과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던 그 흐뭇한 미소와 차분함이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잊어버리기 전에 이 기분 좋은 꿈의 기억을 기록해 두고 싶어졌다.


문득 오래도록 시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어떤 사건으로 인해 오랜 시간 시를 잊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멀리한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이상하게도 어젯밤 꿈을 꾼 이후로 다시, 그리고 꾸준히 시를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마치 격려처럼. 한강 작가님이 꿈속에서 내게 다시 시를 쓰라고. 뭐든 좋으니 다시 시작하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꿈속의 시간적 배경은 늦은 밤이었다. 나는 청소년 시기에 밤과 새벽에 줄곧 깨어있었고 그 시간에 라디오를 들었다. 자정에 시작하는 '배유정의 영화음악(정은임 아나운서 다음 MC였다)'과 2시와 4시 사이 김지은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라디오를 들으며 라디오 작가의 꿈을 키웠다. 그래서일까. 어젯밤에도 한강 작가님은 늦은 밤 라디오를 진행하였고 나는 그 차분한 목소리가 마냥 좋았고 작가님의 나의 작품을 소개해준다는 게 설레고 영광스러웠다. 모든 게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작별이었을까.'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다.


'완전히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이제 다시 만날 수 없을까.'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그것이 작별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그냥 잠시의 '쉼'이었음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어제의 꿈이 아직 시와 작별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꿈속에 나타나준 한강 작가님께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든다.


* 읽은 책으로 글을 씁니다.


<넘기지 못한 페이지>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 ㅣ 한강


p.190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불꽃들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아무것도 더 묻지 않는 그녀의 태도가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확고해서, 지금 내가 짐작하는 그녀의 생각이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인선은 언제나처럼 이곳에서 나무 작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고, 서울에서 내가 받은 문자와 이 섬에서 겪은 모든 것이 망자의 환상이었을 뿐이라고.


그러잖아도 너한테 보여주고 싶었는데.

벽면에 기대선 나무들을 가리키며 인선이 물었다.

어떤 것 같아?

솔직하게 나는 대답했다.

나는 사람의 키 정도를 생각했는데,

처음엔 그렇게도 해봤어.

스케일을 바꾼 이유를 이어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말을 아꼈다. 작업대 상판을 짚고 바닥으로 내려서며 가볍게 물었다.

차 마실까?

성큼성큼 작업장을 가로질러 숲 쪽으로 난 앞문을 향해 걸어가는 인선의 뒷모습을 나는 바라보았다.

정전되면 안채에서 고체연료를 쓰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아마한텐 해로우니까 여기서 마시고 가자.

나에게서 멀어진 만큼 인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가 앞문을 열자 한결 실내가 밝아졌다. 그 빛에 의지해 문 옆 조그만 냉장고의 불 꺼진 냉동실을 뒤적이며 인선은 모르는 노래의 한 소절을 허밍으로 불렀다. 시고 심심한 산열매를 또 끓이려는 걸까.

제목이 뭐야?

밀폐용기에 담긴 것을 나무 숟가락으로 덜어 주전자에 넣다 말고 인선이 물었다.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주전자와 머그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걸어오며 인선이 되뇌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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