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는 이름의 기적
자립청년이자, 트라우마 생존자입니다.
생존자의 하루는 종종
현재보다 과거에 머물러 있곤 합니다.
마음은 자꾸만 기억 속으로 끌려가고,
몸은 그저 하루를 견디며 살아냅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살아내는 현재에 집중하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저에게도 조금은 덜 아픈 날이 오겠지요?
이사 온 집에서의 일상이,
조금씩 이어지고 있다.
이제야 조금은, 익숙해져 가고 있는 듯하다.
아늑한 소파와 거실 조명,
선물 받은 다육이들,
그리고 여전히 낯선 이층 침대가 놓인 내 방까지.
처음엔 집이 낯설어
현관 앞에서 한참을 숨 고르곤 했다.
그다음엔 방에서 좀처럼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용기가 생겼다.
문을 열어 거실로 나가는 일이
더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는 오히려,
방보다 거실이 더 익숙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익숙해진다는 건,
어쩌면 그렇게
아주 천천히,
살아낸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마음이 저 바닥 아래까지 고꾸라지는 날이 잦았다.
살아낸다는 건
어려운 일투성이를 거뜬히 지나야만 가능한 일이고,
힘든 날일수록
더 깊고 복잡한 순간들이 몰려오기 마련이다.
그러다 어느 날,
사직서를 냈다 반려당하고,
한 친구의 자살 시도를 막은 날이 있었다.
그날 밤, 경찰차를 타고 씩씩하게 집 근처까지 돌아와 놓고선
집 앞 그 짧은 거리를
펑펑 울며 들어왔다.
시원한 물 한잔이 간절해
냉장고를 열었는데—
냉장고가 가득 차 있었다.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아무 말 없이, 정성껏 채워두고 가신 것들이었다.
여러 종류의 반찬들,
내 돈으로는 잘 사 먹지 않던 과일들,
건강을 생각한 각종 채소들까지.
그날,
가득 찬 냉장고가
위로로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마치 이 공간은
안전한 곳이며—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선명하게 알려주는 장면 같았다.
3일을 연달아 쉬었다.
쉬는 내내 ‘현재’가 아닌, 철저히 ‘과거’에 머물렀다.
한 번 끄집어낸 기억들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고,
그 기억들을 따라 감정도 복받쳐 올라
어찌할 수 없이 무너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한 편을 써내고도,
그 뒤를 잇는 기억들이 도저히 멈추지 않아
진이 다 빠진 채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가도—
‘다음을 써야만 숨 쉴 수 있을 것 같아’
의무처럼 문장을 이어나갔다.
기억의 조각들은 강렬했고,
분명 겪어온 일들인데도 믿기지가 않았다.
울다가, 써내다가, 다시 지웠다가—
그렇게 나는 꼬박 3일을 버텼다.
물론 그 와중에도,
예전 동네로 돌아가 투표를 하고,
상담을 받으며 감정의 전환을 시도하기도 했다.
요즘,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수치는 왜 다시 말해져야 하는가?”
말할수록 다시 아프고,
때론 나를 죽음 앞에 세우는 듯한
감각이 밀려오지만—
그럼에도, 나는 안다.
이 문장들이 내가 살아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또 나를 숨 쉬게 해주는 찰나가 되어준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 찰나에 기대어
또 하루를 살아낸다.
건강한 것들을 챙겨 먹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 가운데서도,
특히 ‘건강을 챙기는 것’은 내가 가장 못하는 분야인데 말이다.
요리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내가 요즘,
무의식의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다.
‘나의 무의식은 철저히 나를 살리는 쪽으로
데려다 두는구나’ 싶은 날이었다.
며칠 전,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마트를 갔다.
분명 메모까지 해뒀는데—
적어간 목록은 기억 저편에 둔 채,
알록달록한 색감에 홀린 사람처럼
오이, 파프리카, 토마토, 양파만
장바구니에 담아 돌아왔다.
조금은 신기한 일이었다.
화이트 발사믹과 올리브오일, 소금과 후추를 꺼내
그 알록달록한 채소들을 조심스레 섞었다.
어설프지만 한가득 만들어진 샐러드.
요즘은 그 샐러드를 식전마다 꺼내어
매 끼니마다 정성처럼 먹고 있다.
건강을 챙긴다기보다는
‘살고 싶다’는 마음의 조각들이
몸을 통해 반응한 결과 같았다.
문제는…
냉장고에 여전히 가득 남아 있는 채소들.
조금 과했나 싶긴 해도,
이 또한 살고자 하는 마음의 과잉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계속해서 글을 쓰다 보니
생각지 못했던 기회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다.
그중 하나는,
정식 연재 칼럼 제안이었고
또 하나는—
브런치 스토리 작가 신청에 성공한 일이다.
사실 얼마 전,
멋모르고 도전했던 첫 번째 신청은 보기 좋게 탈락했다.
그때 꽤나 낙심했고,
당분간은 다시 도전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접었었다.
하지만,
이 또한 무의식이 이끈 걸까.
어느 날 오기가 생겼고
바로 다시 신청서를 작성해 도전했다.
그리고 두 번째 도전은 성공이었다.
첫 번째 실패의 기억은
생각보다 마음에 깊이 남아 있었다.
브런치는
‘선한 영향력을 전할 글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 문장을 본 순간,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나의 글이
그 ‘선함’의 조건에 닿을 수 있을까?
요즘 나는,
내 글이 고통의 확산 통로는 아닐지,
누군가의 상처를 더 건드리는 매개체는 아닐지
자주 고민하게 된다.
나는 내 글을
‘잘 쓴 글’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감정에 휩쓸려
막 쓰이는 문장들에 가깝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브런치라는 또 하나의 공간에
나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펼칠 수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숨 쉴 수 있는 자리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참 고맙다.
상담 선생님께
한동안, 아니 거의 매번
죽고 싶다는 말을 건넸다.
상담을 이어온 지도 벌써 6개월.
‘나아졌다’고 느끼는 지점은
사실 아직까지도 찾기 어렵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6개월 동안
나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고,
여전히 살아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나아짐’ 일지 모른다.
선생님은 참 신기한 분이다.
무슨 말을 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시고,
내 모든 부정을
잔잔한 긍정의 언어로 바꾸어 주신다.
선생님 앞에서 꺼낸 고통은
단조로워지다가,
이내 힘을 잃고
조용히 가라앉는다.
그 덕분에—
무기력한 내가
이만큼의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를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번역이 쉬워지듯이,
나는 선생님을 만나
고통의 조각들이
조금씩 빛을 입어가는 중이다.
언젠가는,
스스로 그 고통에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될까?
지금은 아직,
그 가능성을 믿어보는
조심스러운 첫 연습 중이다.
#7. 우리는 따로, 또 함께 걷고 있다
요즘, 사람들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걸음걸이, 표정, 대화의 패턴, 그리고 이웃의 존재까지도—
하루를 살아가는 다양한 얼굴들을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
늦은 퇴근 후,
지친 얼굴로 버스에 앉아 있는 사람들.
옥상에서 바람을 쐬다 마주친 건너편 옥상의 누군가.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직장 동료들.
밝게 인사해 주는 회원들과 처음 마주한 이웃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면서,
문득 ‘아, 나도 세상의 일부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같은 하늘 아래,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우리는 따로 또 함께 걷고 있구나.
어쩌면 생존은,
그렇게 별 것 아닐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삶 속에서
모두가 주인공이고,
모두가 자신만의 에피소드를 고군분투하며 살아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 이 힘든 오늘도
조금은, 괜찮아진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늘도,
모두에게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최근, 운동화를 두 켤레나 선물 받았다.
아직도 발의 통증 때문에 뛸 수는 없고,
운동할 여력도 남아 있진 않지만—
그 운동화를 바라보다 문득,
‘다시 뛰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닝을 즐기는 지인을 통해
뛰는 감격을 자주 전해 들었던 터라,
그 마음이 더 또렷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운동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근무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운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 공간을 애정한다.
그리고 문득,
예전의 내가 떠오른다.
열정과 끈기의 아이콘이던 시절.
온 힘을 다해 움직였던 나.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다.
지금의 목표는 오직 하나—
살아내기.
조급해하지 않기로 한다.
욕심내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다짐하고도,
또다시 조급한 마음을 품는 나를 본다.
괜찮다.
이 또한,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오래전, 지인에게 선물했던 향이 있다.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얼마 전, 그 지인이 내게 같은 향을 다시 선물해 주었다.
“정원님이 줬던 그 향이 너무 좋아서,
이번엔 정원님께 제가 선물하려 해요.”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향을 선물한다는 건 어쩌면,
“내내 나를 기억해 주세요.”
“당신의 하루가 이 향기처럼 오래도록 좋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뜻이 담긴 건 아닐까.
택배 상자를 열자마자—
예쁜 엽서, 단정한 박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쏙 드는 향.
퍼지는 프리지아 향만큼이나,
진하게 번져온 그 마음이 고마웠다.
세심한 내 곁에, 더 세심한 사람이 있어준다는 건
결국 삶의 결을 바꿔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날,
지친 하루의 끝이
그 향기처럼 포근하고 따뜻했다.
이런 것이 살아 있는 하루의 기쁨이겠지.
소확행,
그 단어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최고!
어김없이, 새벽 네 시가 찾아왔다.
오늘도 아프냐고 묻는다면— 글쎄. 잘 모르겠다.
아직 잠들지 않았기 때문에
악몽을 꾸지도 않았고,
이렇게 일상을 쓰며 현재를 진득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조금은 괜찮은 것도 같다.
하루를 끝맺을 문장을 써내기에
딱 좋은 시간.
새벽 네 시의 나는,
언제나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바람대로 될 수 없었던 지난날들엔
이 시간이 사라지길 기도하곤 했다.
그토록 긴, 고요하고도 날 선 새벽의 시간들.
그런데 오늘의 나는,
조금 다르다.
이 시간 속에서 오히려 완전함을 느낀다.
내게 딱, 적당한 시간이었나 보다.
문장을 쓰는 내가 가장 깊어지는 때—
어쩌면,
가장 나를 살게 하는 시간이
바로 이 새벽 네 시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이 시간조차
조용히 애정하게 될까.
모르겠다.
다만 오늘은,
이제 그만 잠들고 싶다.
긴 불면의 밤 끝에 잠든 어느 날의 새벽 네 시엔
문장도, 하루도, 그리고 삶도
조금은 더 자라나 있기를.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오늘이라는 하루를 만들었다.
생각보다, 꽤나 근사한 하루였다.
그리고 문득 알게 되었다.
하루는, 기적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발 내딛는 그 모든 찰나들이
사실은 기적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