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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이 아빠
Sep 07. 2021
#26 이해는 못해, 그저 읽을뿐
입사 초기, 개정된 법규가 법규집으로 만들어지기 전 오탈자를 잡아내는 일을 한 적이 있다.
수백개 넘는 조문을 보고 또 보면서 오탈자를 세밀히 찾다보면,
그 법과 규칙을 10번도 넘게 자세히 읽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오탈자만 찾을 뿐 그 조문들의 내용은 거의 이해할 수도 없고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십 여차례 아주 꼼꼼히 읽어보았으나 내용은 전혀 알지 못하다니..
신기한 일이다.
글씨 읽기를 좋아하는 콩이.
글의 의미나 맥락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그냥 일단 읽어댄다.
표지판이고 현수막이고 게시판이고 읽어대기 바쁘다.
한글을 막 깨쳤을 때 읽는 재미에 빠져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고,
글씨를 익힌지 1년도 넘었지만 여전히 글씨만 보면 읽기 바쁘다.
콩이는 여러번 읽으니 그 글들을 외우기도 하지만 내용에 대한 이해는 없다.
아빠는 그 상황이 이해가 된다.
공원의 안내 표지판을 동화책인 양 읽는다.
"아빠, 음주가무가 뭐야?"
"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 거야"
"어떻게?"
"나나나~ 노래 부르고 댄스댄스~ 춤추고.. 신나게 신나게"
잠시 생각하는 녀석..
씨익 웃으며 "근데 왜 못하게 해?"
음.. 그러게..
아. 공원에서 술먹고 그러면 안되니까 그렇지.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
현수막 글씨를 읽는다.
'비운다! 라벨 뗀다! 압축한다! 배출한다!'
"라벨 떼는게 뭐야? 압축하는 건 뭐야?"
집에 돌아와서 생수 패트병을
들고
남은 물을 마셨다.
라벨이 뭔지 알려주고, 어떻게 떼는지 알려주고, 압축이 뭔지 알려준다.
신났다 우리 콩이
라벨을 주욱 벗겨내고, 양 손으로 패트병을 누른다.
잘 안되는지 일어나서 발로 밟아댄다.
"아빠, 이게 압축이야? 재밌다."
외출용으로 사둔 작은 패트병 생수들을 몇개 더 꺼
낸다.
"비우고! 라벨 떼고! 압축!!"
콩이를 우리집 패트병 재활용 담당으로 임명한다.
놀이센터 가는 길 엘리베이터 안의 한의원 광고물. 한약먹는 그림과 함께 '생리통 안녕'
우리 콩이 큰 소리로 읽는다.
"아빠, 생리통이 누구야? 안녕이라네."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좀 편치 않다.
조용히 말하라고 하면 더 크게 말한다.
"아빠, 생리통이가 누구냐고??"
퍼즐이나 보드게임이 새로 생기면 먼저 여기저기 글씨부터 읽는다.
귀퉁이의 작은 주의사항도 중요사항인 양 그저 읽어댄다.
읽음 뒤엔 역시나 질문이 따른다.
"아빠, 왜 아동이 조각을 입에 넣지 않도록 주의하래?"
"아빠, 왜 불에 가까지 대지 말래?"
어떤 게임인지 궁금해 읽는 것이 아니고 그냥 글씨가 거기 있으니 읽는다.
막상 게임은 뒷전이고 규칙을 읽기만 했지 게임을 어떻게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다보니 손소독제를 식탁에 두었다.
"아빠, 손소 독제겔이 뭐야?", "손 소속제라는 말이야."
"아빠, 피부자 극증상이 뭐야?"
"아빠, 왜 사용을 즉각 중지하고 의사, 치과의사, 약사와 상의하래?"
손소독제를 보고 사용상 주의사항을 읽어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코로나 걸리니까 이걸로 손 소독을 잘 하라는 거야~"
메뚜기 떼가 농작물을 보이는 족족 갉아먹듯이
글씨가 보이는 대로 소리내어 읽어대는 통에 글 낭독력은 상당히 좋다.
콩이의 상태를 모르고 듣는 사람이라면
내용을 파악하면서 읽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어려운 단어도 또렷이 읽는다.
물론 글을 낭낭히 읽어댄다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인어공주를 낭독하지만 내용은 따로 설명해 줘야 한다.
보드게임 규칙을 또렷하게 낭독해 내지만 그 게임을 하려면 하나하나 규칙을 알려줘야 겨우 이해할까 말까다.
책 읽는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활동을 할까 하여 집에 있는 책을 거의 숨겨 놓고 못보게 했다.
역효과가 생긴거 같다.
어린이집과 발달센터에서 더 책에 집착한다.
눈 앞에 보이는 글씨라는 선호 자극에 집착하는 것이
자폐스펙트럼 아동이 보이는 감각 추구의 일부인 것을 알면서 마냥 방치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몇 안되는 취미를 무턱대고 막을 수는 없다.
또렷한 발음으로 때로는 감정을 넣어가면 글씨 잘 읽는 것이 콩이의 능력이라면 능력인데
좋게만 평가할 수 없는 상황이 아쉽다.
마구마구 읽다보면 이해도 하지 않을는지..
막연한 희망사항이겠지만..
책을 숨기기도 하고, 가끔 새로운 책을 사다 놓기도 하고..
갈팡질팡 아빠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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