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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oS Apr 19. 2021

여행자의 머리카락에 새겨진 번뇌

*사소한 것에 의미부여 OJIM주의*



허리까지 기른 머리카락을 잘랐다.

일상에 찾아온 몇 가지 변화에 맞춰 내린 결정이었다. 주 4일에서 주 5일로, 오후 출근에서 오전 출근으로 근무 패턴이 바뀌었고, 퇴근 후 글을 쓰거나 읽기 시작했다. 고정 일과 시간이 늘어나니 하루가 약간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 나는 20분간 전쟁을 치렀다. 풍성하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과의 싸움이었다.

머리를 감고 말리는데 드는 시간과 에너지가 아까웠다. 게다가 그동안 쓴 물과 샴푸의 양을 생각해보면 환경파괴범이 따로 없었다. 긴 머리카락은 시간적, 경제적, 환경적으로도 그렇고 내 목디스크 건강에도 그렇고 여러모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한마디로 '긴 머리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잘라버렸다. 최대한 자를 수 있을 만큼 짧게.


사실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 의자에 앉는 순간까지 크게 망설였다. 머리카락에  사람의 직업, 거주지, 식생활 같은 정보가 나이테처럼 쌓여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려 4년 전, 그러니까 2017년 3월 배낭여행을 떠나기 직전 짧게 잘라버린 이후부터 기른 머리카락이었다.

각각 8개월과 2개월 반 동안 했던 두 번의 배낭여행.

여행 에세이 독립출판, 라퍼커션 활동, 도시재생 코디네이터 일을 하며 보냈던 서울에서의 2년.

느린 속도의 라이프스타일을 갖기 위해 안동에서 지낸 11개월.

틈틈이 방문했던 한국의 18개의 도시들까지.

부단히 떠돌아다녔던 그간의 행적이 전부 머리카락에 물리적으로 담겨있었다. 그러므로 나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항상 지니고 다니던 여행 기념품을 버리는 것과 비슷한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내 머리카락을 분석하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머리카락에 삶의 흔적이 쌓인다는 것을 인류는 오래전부터 직감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고대로부터 힘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시대에 따라 특정 지위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머리 모양이 있기도 했다. 현대에는 실연의 아픔을, 종교적 신념을, 투쟁의 의지를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게 인류는 머리카락에 꽤나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한편 불교에서 머리카락은 '번뇌'를 상징한다.


번뇌, 煩惱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을 나타내는 불교 심리 용어.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있다고 보아 이를 3가지 독(三毒)이라 한다.
불교 경전에서는 이 번뇌의 다른 표현으로 미혹함·잠듦·물듦·흐름·얽매임 등을 사용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머리카락에 새겨진 나의 번뇌는 바로 '방랑의 유혹'이었다.

한 곳에 1년쯤 머물게 되면 어김없이 그곳을 떠나버리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안동에 온 지 이제 막 1년이 되어가던 참에 머리카락을 자른 것은 이번에는 떠나지 않겠다는 무의식에 새긴 다짐이기도 했다.

잘라버린 머리카락은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기부했다. 시간도 아끼고, 번뇌도 끊어버리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도 했으니 1석 3조다.


잘 가라 번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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