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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수진 Aug 28. 2023

오래된 거리에 서서

오래된 거리처럼 사랑을 알게 되다

  안개가 걷혀가는 새벽 6시경, 일찍 잠을 깨어 두꺼운 카디건을 꺼내 걸쳤다. 거리로 나왔다. 어제 잠들기 전 들었던 생각을 얼른 행동으로 옮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문을 열고 나가자 온통 논밭이다. 고양이 집에 깔아주면 한 철 나기 제격이라는 볏짚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볏짚을 주워 담다 말고 몇 발치 앞에 버스정류장이 눈에 들어온다. 동네 할머니들은 이곳에서 대략 두 시간마다 시간도 제각각인 시골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오기 한 시간도 더 남은 시간에 할머니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때는 햇볕을 가려줄 시설물도 없어 버스정류장에는 큰 플라타너스 나무 하나만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 아래 그림자에 숨어 뙤약볕을 피했다. 동그란 플라타너스 열매들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농사로는 감자, 딸기, 수박이 흔하지만 안개가 진정 이곳의 특산품이 아닐까. 어젯밤 위세를 떨쳤던 안개가 지금에서야 걷혀가고 있으니까. 밀양시 하남읍. 창원 대산면과 맞닿은 밀양의 끝자락. 부모님은 이곳에서 나를 낳고 키웠다.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녁부터 사방이 안개로 자욱해지면 선 채로 신발 코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는 날이 있다. 혼자 아기를 태우고 부모님 댁에 하루 묵고 오겠다고 나선 길이었다. 아뿔싸, 그 안개에 갇혔다. 논두렁으로 차가 빠질 것 같은 생각에 긴장되었다. 천천히 차를 몰았다.  2~3분이면 닿았을 거리를 20분 만에 닿았다. 엄마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아기를 엄마에게 넘겨주자마자 빠르게 집으로 들어와 자리를 펴고 누웠다. 지친 몸으로 정신만은 더욱 또렷해져 오래된 거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시인의 [청혼]

 무슨 말인지 몰랐다. 모르면서 좋았다.

 이곳은 내 오래된 거리. 이 거리의 앞 뒤를 번갈아 응시했다. 많은 내가 이 거리를 걸었다.


엄마 등에 업혀 포대기에 싸여있었다.

중참을 머리에 이고 가는 엄마 손을 잡고 같이 걸었다.

초등학교 내내 자전거를 타고 내달렸다.

하루종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느라 얼굴이 정말 새까맸다.

피아노 학원차 아저씨가 콧노래를 부르면서 나를 태웠다.

교복을 입기 시작하면서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매일매일 선크림을 꼬박꼬박 발라 얼굴이 정말 하얘졌다.

밖으로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사설 셔틀버스를 탔다.

대학에 들어가고 파마를 했다.

가끔 집에 올 때,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는 동네 할머니를 마주쳤다.

"아이고, 네가 이리 많이 컸나. 세월 참 빠르다."


  아롱이, 다롱이 언제나 마당에는 개가 있었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개 삽니다. 큰 개나 작은 개 삽니다. 개 파이소, 개, '이 길로 개장수가 파란색 빈 트럭을 끌고 들어왔다가, 동네를 한 바퀴 돌아 몇 마리의 개를 태우고 빠져나갔다. 개는 한두 해만 살다가 팔려나가기 일쑤였다. 동네 사람들은 개가 요물이 되기 전에 팔아야 된다고 믿었다. 개가 땅을 파면 집안에 흉이 든다고 했다. 팔 때가 된 것이다. 개가 새끼를 낳으면 이 집 저 집 나누어주고 하얀 강아지는 남겼다. 흰 강아지가 복을 가져준다고 했다. 그래도 땅을 파면 어김없이 개장수에게 팔려갔다. 정말 터무니없이 무지한 시절이었다.

   어릴적 우리 집은 탱자나무가 뒷담이었다. 귀신도 못 들어온다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뒤에 두고,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심심하면 탱자나무 가시를 툭 부러뜨려 손가락 껍데기에다 바느질을 했다. 손가락에 달랑거리며 가시가 매달아 졌다. 마당에는 붓꽃이 늘 가득 폈고 봉오리를 터뜨리면 손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한 겨울에도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하면서도 귀마개를 하지 않았다. 귀가 빨갛게 얼었다. 얼굴에 자국이 남는 게 무엇보다 싫었다. 이 길 따라 조금 멀리에는 언덕이 있다. 옆 동네에서 우리 동네까지 오줌에 떠밀려 왔다 했다. 작은 언덕은 전설을 먹고 5월이면 아카시아 꽃을 무더기로 피워냈다. 학교 마치고 오는 길에는 어김없이 언덕에 올랐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아키 시아 향기가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자전거 뒷 받침대를 얼른 툭 차 놓고 아카시아를 향해 뛰었다. 한참 동안 아카시아 꿀을 따먹었다.

  팔팔 끓인 보리차 주전자가 내 머리 위로 쏟아진 날, 큰언니는 자전거 뒤에 나를 싣고 동네 보건소로  내달렸다. 학원차를 기다리는데 졸졸 나를 쫓아 나온 우리 집 개가 차에 치인  날, 눈물범벅이 되어 개를 어깨에 들쳐 매고 집으로 갔다. 개의 꼬리가 도로에 계속 끌렸다. 농약을 치던 엄마가 구급차에 실려 나갔다. 정면으로 불어든 바람에 꼼짝없이 농약을 마셨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잠자리 날개를 뜯어먹는 기괴한 아이, 아버지의 술냄내, 한 여름 마당 가운데 고무목욕통으로 만든 수영장, 당산나무 아래, 깡통 속에서 썩은 개구리 알, 불놀이, 고드름, 비료포대썰매.  오래된 거리는 나의 세계를, 그 속에 모든 사람과 사물들을 소환했다. 누가 누군가에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당신을 사랑한다 청혼한다면, 당신의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는 의미임에 틀림없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 가슴 벅찼던 순간, 하릴없이 평범했던 순간 혹은 숨기고 싶은 순간들 이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 상대의 삶을 그대로 인정하고 모든 순간을 긍정하는 사랑. 오래된 거리에 서서 오래된 거리처럼 하는 사랑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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