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꽃을 샀다. 도매시장에서 사온 뚱뚱한 꽃들을 하나씩 풀어 컨디셔닝을 시작했다. 가시와 잎을 정리하고 줄기 끝은 사선으로 잘랐다. 물을 넣은 꽃통에 탕 하고 꽃을 꽂아 넣었다. 이렇게 물올림에 유리해진다. 그리고 락스와 설탕을 섞어 만든 수명연장제를 넣었다. 수명하니까 떠오르는 분이 있다.
시선생님의 시선생님, 시인의 시인인 시인의 수업을 들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위해선 필사의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시인은 집안 곳곳에 큰 달력에 출전시킬 몇 명의 선수들을 크게 써놓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순간마다 계속 읽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고쳐나갔다. 언젠가 미국 유학 시절 독실한 기독교인을 안 적이 있다. 그분이 이사 나간 교회 건물의 다락방에는 성경필사로 온 벽이 까맸다고 했다. 그 방을 보러 간 오빠는 조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정말 이 정도로 미쳐야만 쓸 수 있는 시라면 나는 안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자신의 수명을 줄여가며 시를 써내는데, 시를 읽는 독자가 쉽게 읽고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시인은 말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감상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된 초보자들은 시를 시작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하는 말 같이도 들렸다.
심언주 시인의 <수영장>을 함께 읽었다. '티백처럼 나는 물에 잠긴다'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티백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인생에 대해 녹여 쓴 시 같았다. 하지만 시인은 시에서 등장하는 '물고기'나 '나룻배'는 티백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했다. 티백은 이 시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수영장이 전체 배경이며 수영하는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인생에 녹여 쓴 시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납득되지 않았다.
<수영장>의 화자는 티백처럼 물에 잠겼다. 물고기 모양이 되기도 하고 나룻배 모양이 되기도 한다. 물속에서 알맞게 우러나온다고 말한다. '밀어내면 물이 더 들어오는' 건 수영하는 모양새가 아니라 티백을 흔들어 물이 더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의 살점들이 튀어 오른다'라고 말하고 있다. '떠나면서 살을 떼어내'는 건 티백 속에 든 가루로 된 내용물이 물에 우려 져 사라지는 것이다. 직립을 포기한 것과 해자에서 발버둥 치는 내용 또한 찻잔 안에 티백줄에 묶인 신세를 뜻한다. 멀찍이서 나를 바라보면서 허우적 거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네'는 이제 적당히 우러난 차를 마셔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여전히 물고기 같거나 나룻배 같다는 말은 티백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뭘까? 구글 검색창을 띄워놓고 티백 물고기를 검색했다. 물갈퀴가 정말 많은 물고기 모양의 티백 사진이 즐비했다. 정말 물고기 모양의 티백이 있었다.
때로는 하나만 집요하게 파고들어 연구한 초심자가, 그 하나에 대해선 그 분야의 전문가보다 나을 때도 있다. 이건 나의 전문분야 영어교육에서도 가끔 진실인데, 학생이 나보다 더 나을 때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학생은 가르침이 필요하다. 여전히 내가 맞았다고 생각이 든다. 이렇게 까지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아마도 시인님이 답변이 왜 그모양이냐고 쪽을 주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거 같기도 하다. 꽃통에 수명연장제를 조금 더 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