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비밀을 찾아서
1. 집이나 방 따위의 둘레를 막은 수직 건조물.
2.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나 장애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표준국어대사전.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두운 배경 위 반짝거리는 밝은 별들이 눈에 들어온다. 각각의 별들로부터 출발한 빛들은 무구한 시간을 뚫고 지구로 달려와 우리의 눈에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몇몇 별들은 이미 생을 다해 죽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시간이 그 빛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빛은 우리 우주에서 넘을 수 없는 한계 속도임과 동시에 과거를 담는 저장고이기도 하다. 우리는 더 먼 곳을 볼수록 더 먼 과거를 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 멀리 더 멀리 과거를 살펴보다 보면 마침내 더 이상 알 수 없는 벽이 나타난다. 마치 이보다 더 먼 진실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굳게 잠겨 있는 거대한 장벽이다. 이 벽의 이름은 우주 최초의 자유를 만끽한 빛의 흔적 ‘우주 배경 복사 (CMB)’ 이다. 지금껏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먼 우주임과 동시에 가장 오래된 우주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는 아주 먼 옛날, 틀림없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보다 작은 크기였을 것이고, 물질들은 더욱 오밀조밀했을 것이며, 더 뜨거웠을 것이다. 지금은 이 뜨거운 상태에 관해 집중해 보려고 한다. 얼음을 상온에 두면 물이 되고, 물을 끓이면 수증기가 된다. 물 뿐만 아니라 모든 물체는 뜨거워지면 기체가 된다. 하지만 이 기체를 더 뜨겁게 만들면 어떻게 될까?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양과 지구처럼 전자가 원자핵을 돌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원자에 에너지를 공급하면 전자는 원자핵에 붙들려 있지 않고 탈출해 따로 돌아다니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데 이런 상태를 ‘플라스마’라고 부른다.
우리가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플라즈마는 태양이다. 태양과 같은 별들은 자신을 불태우며 플라즈마 상태로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플라즈마라고 하는 물질 상태는 빛을 가둬버린다는 것이다. 빛은 플라즈마로 되어있는 물질을 통과할 때 플라즈마 안의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전자가 빛의 진행을 방해하곤 한다. 그래서 빛은 직진하지 못하고 플라즈마 내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눈으로 보는 태양 빛은 표면에서 탈출하고 지구로 오는데 8분 19초 정도가 걸리지만, 태양의 중심에서 만들어진 빛이 표면으로 나오는데 대략 17만 년 정도가 소모된다.
우주가 아주 뜨거웠던 그 시절 우주는 태양의 내부와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빛은 직진하지 못하고 플라즈마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우주가 커지고 팽창하면서 차츰차츰 차가워지자 전자는 에너지를 잃고 원자핵에 속박되었다. 그렇게 플라즈마는 기체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빛은 자유를 얻어 투명해진 우주를 활보하기 시작한다. 이 빛은 처음 자유를 얻었을 땐 3000도의 온도였지만, 130억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뜨거웠던 원래 모습을 잃어버리고 지금 영하 270도의 우주 배경 복사로 우리에게 관측되고 있다.
우리는 우주 배경 복사라는 벽 뒤에 있었던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다. 하지만 자유롭지 못했던 빛은 그 과거의 시간을 잡지 못하였고, 우리는 그 벽 너머 세상을 보지 못한 채 벽 앞을 서성이고만 있었다. 그때 벽 뒤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빛으로만 과거를 보고자 했던 우리를 놀리려는 것처럼 유령과 같이 벽을 통과해 우리에게 오는 입자와 파동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벽 너머의 태초의 우주를 품고 날아온 중성미자(Neutrino)와 중력파(gravitational wave)가 그것이다.
중성미자는 중력과 약력에만 반응하는 아주 작은 질량을 가진 입자인데 일반적인 물질들은 다 통과해서 ‘유령입자’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따라서 이 입자가 하는 얘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우리가 볼 수 없는 벽 너머의 상황을 희미하게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이 입자가 워낙 물질과 반응하지 않기로 유명해서 현재 과학자들은 간접적으로 엿보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중성미자가 물 분자를 통과할 때 아주 희박한 확률로 원자핵과 상호반응을 하는데 그때 발생하는 입자가 물 안에서 이동할 때 우리가 관측 가능한 빛이 나오게 된다. 그 빛을 연구하여 중성미자가 출발한 곳의 환경을 알아내는 것이다.
중력파의 경우 2015년에야 비로소 그 존재가 감지되었다. 중력이라는 힘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시공간을 뒤틀면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우주 공간에서 거대한 질량을 가진 물체들이 가속하거나 폭발하면 이 시공간의 뒤틀림이 파동처럼 퍼져나가는 것이 바로 중력파이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중력파의 존재를 예측하고 100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감지될 정도로 중력파는 약하면서도 일반 물질들과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력파는 우주배경복사라는 벽도 자유롭게 통과하여 우리에게 벽 너머의 상황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우주는 빅뱅이라고 하는 우주 탄생 이후 지금까지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수 없는 거대한 폭발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벽 너머에서 오는 중력파에 자세히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 당시의 급박했던 폭발의 현장을 전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벽을 통과해 거의 빛의 속도로 날아오는 이 희미한 속삭임을 엿듣는 것뿐이다. 우리는 더 먼 우주 더 먼 과거의 우주를 향해 지금도 벽에 귀를 대고 볼 수 없는 우주의 과거를 그려본다. 아직은 넘을 수 없는 벽 너머의 세상을 그리며 우리는 계속해서 벽을 두드린다. 지금은 잘 알 수 없는 벽 너머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오래돼서 벽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것도 문이야...
-영화 설국열차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