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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2021. 5. 26. - 2021. 5. 31.

by 바람




다음 주 화요일부터 학교로 직접 간다.

규제가 풀려 이제 대면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편한 생활이 사라지겠지만 더 움직일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을 거다.

지금은 온라인 수업 후에 저녁거리를 사러 갈 때나 산책을 하면서 걷긴 하지만 운동량이 많이 부족하다.

화상으로 수업 받으며 앉아있고 먹고 마시고 누워서 넷플릭스 보는 시간이 더 많으니 원.

한국에서는 어땠었는지 생각해 본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사람 많은 수변공원을 걷거나 헬스장에서 G.X. 를 하거나 해서 지금처럼 몸과 마음이 나태로 부풀어 오르진 않았었다.

이제 학교로 직접 다니면 조금이라도 부지런해질 수 있겠지.


옷을 너무 조금 가져왔지만 나이 든 아줌마의 장점을 누릴 수 있으니 괜찮다.

이곳에서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하나씩 사지 뭐.

결핍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기도 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맘에 드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24유로짜리 스커트를 고민 없이 바로 살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지금 집걱정, 밥걱정 안 하고 2.5유로짜리 카푸치노를 매일 마실 수 있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하는데 하나를 할 수 있으면 또 다른 하나를 원하는 욕심이 끊임없이 내 안에 도사린다.

인정욕구도 사라지지 않아서 낮은 레벨의 영어수업에서조차 질문에 답할 수 있으면 우쭐하고 못하면 창피하다.

나이를 먹어도, 흰머리가 많아져도, 이런저런 경험을 해도 큰 도움이 안 된다.


타인의 시선과 인정에 무게중심을 두면 내가 주인공으로 살지 못하고 남의 노예로 얽매이게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

그래도 깨닫고는 있으니 하루하루 수행하듯 내 마음을 잘 다스려 보자.


카푸치노 맛은 처음 마시던 때의 진함이 사라졌다.

익숙해져서 그런가.

남녀사이의 사랑 같다.

환희의 탄성을 지르게 하던 그 진하고 풍미 깊던 커피 맛이 그 전의 맹숭맹숭하던 다른 커피들 맛과 같아지고 있다.

꼭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많은 것들이 익숙해지면 질린다.

평범해지고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기쁨과 감사가 사라진다.

나처럼 뭐든 빨리 질리는 사람은 더 그렇다.

그래서 프로가 되지 못하고 항상 아마추어다.





며칠 전에는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느라 수업 끝나고 저녁 8시 넘어서까지 파워포인트 작업을 했다.

내 성취와 야망들을 5가지씩 말하는 거였는데 새삼스레 그 흔적들을 떠올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붙박여 있었다.

정작 스피킹은 준비하지 않고 사진들과 자랑거리만 생각했다.

남미의 어린 학생들과 한국 학생 한 명, 선생님까지 겨우 9명 정도에게 나를 보여주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이런저런 성취들에 대해 말했다.

낯 뜨겁기도 했지만 내가 살아온 날들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제는 수업 끝나고 뭐 했더라.

나갔다 온 거 같은데 갑자기 기억이 안 난다.

눈도 가물가물하고.

가끔 늙는다는 게 무서울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아, 생각났다. 2주 전에 Green 슈퍼마켓에서 환불대신 Credit으로 처리해 놓은 15유로를 쓰러 스위기에 있는 마켓에 갔다.

뿌리염색은 좀 해야 할 것 같아 염색약이랑

살 빠진다는 녹차랑 알로에오일이랑 시리얼 등을 사 왔다.

집 앞 마트에서는 기어이 맥주를 사 와 시원하게 들이켜 주고 아침에 만들었던 부대찌개에 밥 말아서 먹었다.

고무줄 바지의 허리가 조이는 게 느껴질 정도로 배가 빵빵한데도 저녁마다 맥주든 와인이든 한 잔 마셔야 하루를 잘 마감하는 기분이다.

알코올 중독?

15년 전쯤 호주에서도 그랬지만 그땐 새벽 5시부터 밤 12시 넘어서까지 동동거리고 살았으니 그랬다고 변명하고, 회사 다닐 때는 일과 사람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하고, 지금은 너무 편하고 무료해서 그렇다고 핑계 댄다. 나의 오래된 친구.





5월의 마지막 날.

내일부터는 대면수업이다.

처음 온라인 수업할 때의 어색함이 익숙해지면서 약간 지루함을 느꼈는데 다행이다.

대면 수업하면서 느낄 새로운 낯섦과 불편함, 코로나 위험 등 신경 써야 할 일도 있겠지만 직접 소통하면서 더 배울 수 있을 거고 몸을 좀 더 많이 움직일 수 있어서 기분이 신선해질 것이다.


어제는 모스타에 로툰다 성당을 보러 갔다.

예전에 임디나에 갈 때 지나면서 보았던 아주 큰 성당이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모스크돔이라는 인터넷 글을 보고 가봐야지 했던 곳이다.

몰타의 거리와 도시들은 거의 비슷한데 뭔가 또 다른 느낌이 있다.

한국도 그렇던가? 그런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엔 성당 앞의 몇몇 카페 의자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노인들이 눈에 띄었다.

오래된 나라라 나이 든 사람들도 많은 건가 라는 비논리적 생각을 잠깐 할 정도로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노인들인 경우는 처음이다.

거리를 걷기 전에 성당 내부를 보고 싶어 입구로 가보니 예배가 막 끝났는지 사람들이 나오고

몇 명은 앉아 있길래 나도 들어가서 내부의 화려한 그림들과 장식들을 구경했다.

사진 좀 찍고 앉아 있으니 다시 예배를 시작해 얼떨결에 알아듣지도 못하는 몰타어를 30분 정도 들으며 색다른 경험을 했다.

한국에서 어렸을 때 교회에 간 적은 있지만 성당은 한 번도 안 가봤는데 몰타의 유명한 성당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보았다.


가끔 길을 잃거나 원래 목적지와 다른 곳을 가게 되어 오히려 생각하지 못했던 걸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나에게는 그게 여행의 재미이다.

처음 길을 잃었을 때는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지만 일단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구글맵!)과 시간이 있으면 어슬렁거리며 오히려 미지의 세계에 있는 걸 즐기기도 한다.

어제도 그런 식으로 걷다가 정말 큰 쇼핑몰에 다다랐다.

버스 정류장을 찾았는데 운영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어 그저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걷다가 지금까지 몰타에서 본 것 중 가장 큰 PAMA 쇼핑몰을 만났다.

얼른 들어가 서늘한 실내에서 아이쇼핑 하고 내일부터 가지고 다닐 보온병이랑 식료품들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간만에 알찬 일요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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