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 - 2021. 6. 2.
조금 일찍 나와서 발레타에 있는 보타닉 가든으로 오면서 내일은 8시에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출근시간이라 버스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내 앞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내리면서 나에게 앉으라고 한다.
고맙긴 한데 아직 코로나 위험을 무시할 수 없어 조금 헐렁해진 뒷좌석 쪽으로 갔다.
이 나라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인 내가 더 불안하겠지.
마스크를 벗으니 시원한 바람으로 코와 폐가 씻겨지는 것 같다.
작지만 조용한 공원벤치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노트에 끄적거리는 이 시간이 꿈결 같다.
노인들이 혼자 혹은 둘이 공원을 돌며 운동하고 있다. 청바지를 느슨하게 입고 싶은 나도 오늘부터 빨리 걷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어젯밤 12시가 다 된 시간에 잠이 안 온다는 핑계로 와인 한잔을 기어이 더 마셨더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파나돌 2알을 먹고 오늘은 진짜 맥주든 와인이든 마시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작심오전..일 확률이 높다.
저녁에 나와서 좀 걸으면 되는데 한번 집에 들어가면 왜 그렇게 나오기가 싫은지 원.
해가 진 외국 거리는 위험하니까.. 핑계를 대면서 넷플릭스를 본다.
프레젠테이션 때 다른 젊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서 성취가 좀 더 있을 뿐인데 자랑질해놓고 다른 학생들의 발표를 들어보니 모두들 일을 시작했다. 대단하다.
새벽이나 아침 일찍 조깅하는 학생들도 많다.
역시 비교는 금물이다.
나를 드러내려고 하지도 말고 남이 하는 일을 나는 못하거나 안 한다고 의기소침해지지도 말고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나를 다독거린다.
혼자 잘 지내기. 술 마셔도 안주 좋은 걸로 먹기. 열심히 수업받기. 매일 일기 쓰고 걷고 사진 찍기. 한 시간 이상 책 읽기. 유튜브 보면서라도 벨리댄스 추기.
어제는 수업 끝나자마자 잽싸게 나와서 발레타를 돌아다니다 Stone Market의 보헤미안스타일 바지를 샀다.
집에서 입어보니 딱 내가 원하던 자유로운 영혼 분위기다.
무소유를 조금이라도 실천하겠다고 최소한의 것만 들고 와서는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느라 어제도 나름 과소비를 했다.
늙을 때까지 입지 뭐. 북카페 하면서 입어도 멋질 것 같다.
이런 것 보다 맥주를 줄여야 한다.
카푸치노는 매일 마시면서 일기라도 쓰니까 아깝지 않은데 맥주는 배만 나오게 한다.
하루의 노곤과 기분을 좀 풀어주니 그것도 봐줘야 하나.
호주에 1년 정도 살면서 카페의 커피를 마신 건 3번 정도다. 그땐 정말 나한테 1달러도 쓸 수 없었고 무엇보다 카페에 30분 정도도 앉아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말 그대로 선물이다. Present.
계속 비를 그리워했더니 아침 8시쯤부터 막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안 가져왔다.
하나 사야지 했었는데 쨍쨍한 날씨 덕분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런 날은 온라인수업이 좋은데.. 하며 창밖으로 세차게 내리는 비를 구경했다.
나의 이 모습과 밖의 비와 구름들, 잿빛 흐린 하늘 바탕에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비치는 장면.
이 컷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삼각대가 필요하다.
호주에서 찍은 울애기들 사진과 영상이 내 보물인 것처럼 이곳에서의 내 모습도 좀 찍어놓고 싶은데 늘 혼자라 풍경사진뿐이다. 셀피는 영 어색 어색.
반에서 유일한 남학생으로 콜롬비아에서 온 J는 바텐더로 일한다고 한다. 그전에 바에서 일한 경력이 있단다.
나도 기술을 배우고 싶다.
언제 어디에서든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나를 먹여 살리며 다양한 나라에서 사는 걸 상상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