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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부모를 이길 때

「희극의 파편」5. 아리스토파네스 - 구름 中

by 재준

아버지


아, 아, 제우스님... 밤이란 왜 이렇게 긴지 끝이 없군요. 언제까지 밤이 새지 않으려나. 벌써 수탉의 울음소리를 분명 들었는데 하인들은 아직도 코를 골며 잠만 자고.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빌어먹을 전쟁, 거덜 나고 말지. 이런 때엔 하인을 혼쭐내지도 못하거든. 거기다가 이 대견한 아들은 잠을 깨기는커녕 다섯 장의 모포를 덮고 방귀를 뀌고 있으렷다...


좋아, 뜻대로 하시지. 나도 이불을 덮고 코를 골아볼까.

하지만 한심스럽게도 잠이 오지 않는다. 여기 이 아들 덕택으로 낭비에 어이없는 빚투성이. 그런데 이놈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말을 타고 다닌다, 쌍두마차를 몰고 다닌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말을 타고 다니거든. 그러니 나는 파산 지경, 초승달이 그믐달이 되면 이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하인에게) 야, 등잔을 켜라. 그리고 장부를 가져와. 몇 사람에게 빚이 있고 이자가 얼만가 계산을 해야지. 그래, 빌린 돈은? 파시아스에게 십이 무나. 왜 파시아스에게 십이 무나를 빌렸나? 뭐에 썼더라? 그렇지, 곳파의 낙인이 찍힌 말을 살 때였군... 아, 한심스럽다. 차라리 내 눈알을 돌로 산산조각 내지...



아들


(잠자며) 필로, 반칙이야. 너의 코스를 달리란 말이야.



아버지


이야말로 나를 파멸시킨 화근, 잠을 자면서도 마차 경주에 열중하다니.



아들


(잠자며) 마차는 코스를 몇 번 달려야 하지?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희극의 파편」다섯 번째 작품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입니다.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 최고의 희극 작가로, 기원전 5세기 말에서 기원전 4세기 초 사이에 활약했습니다. 고대 희극(Old Comedy)의 대표자이며, 정치 풍자와 시적 재치, 외설적 유머를 자유롭게 구사한 인물입니다.


그 중 대표작 '구름'은 소크라테스를 희화화하며, 신흥 철학자들의 말장난과 궤변적 논리를 비꼬는 희극입니다.


간단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아버지는 경마에 빠져 돈을 낭비하는 아들 때문에 엄청나게 빚을 짊어지고 고민하게 됩니다. 고민 끝에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입씨름으로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기술을 배워서 재판정에서 돈을 빌려준 사람들을 이론으로 누르고 돈을 갚지 않을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 제대로 배울 수 없기에 아들을 소크라테스 제자로 보내게 됩니다. 이후 아들은 빚을 갚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만 입만 발달해버린 아들은 궤변을 펼치며 아버지에게 매질을 해버리고 맙니다. 분통이 터진 아버지는 아들이 다녔던 소크라테스의 학원에 불을 지르며 끝이 나게 됩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아버지


오, 오, 이웃 사람, 친척, 이 고장 사람들아, 살려 다오. 형편없이 얻어맞았다. 아아, 머리에, 턱, 악당 같으니, 아버지를 때리다니!



아들


그래 어쩔 테냐?



아버지


보라, 때렸다고 인정하고 있어.



아들


바로 맞았어.



아버지


악당, 패륜아, 강도.



아들


이건 고마운데, 다음은 뭐야? 욕지거리를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



아버지


색광.



아들


장마의 비를 오게 하지.



아버지


아버지를 때린다...



아들


그래, 그것도 당연하지.



아버지


빌어먹을, 대악당. 왜 아비를 때린 게 당연하니?



아들


그걸 증명하고, 이론으로 이겨 주지.



아버지


이론으로 이긴다고?



아들


쉬운 일이지. 어느 쪽이건 좋은 대로 골라잡아.



아버지


어느 쪽이든?



아들


우월한 쪽이야, 열등한 쪽이야?



아버지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는 게 정당한 일이라고? 그걸 네가 증명할 수 있다면, 정말로 나는 너에게 정의의 반박법을 배우게 한 셈이구나.



아들


이론으로 설득해서 찍소리도 못하게 해주지.



아버지


네 주장을 한번 들어보자꾸나.


(생략)



아들


아버지처럼 어머니도 때려 주겠어.



아버지


뭐, 뭐라고? 그건 더욱 나쁘다.



아들


하지만 만약 열등한 이론 측에 서서 어머니를 때리는 게 당연하다고 증명해서 입씨름에 이긴다면?



아버지


뭐라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소크라테스와 같이 너도 열등한 이론도, 마음대로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려라. 이런 변을 당한 것도, 오 구름이여, 그대 때문, 그대에게 모든 걸 맡겼기 때문. (생략) 오, 구름이여, 무정한 말씀이지만 당연하다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빌린 돈을 갚지 안ㄹ으려는 건 어디까지나 그릇된 일. (아들에게) 자, 귀여운 아들이여, 나와 같이 가서 우리를 속인 더러운 소크라테스를 두들겨 주자.



아들


아니, 선생에게 손찌검을 할 순 없어요.


(생략)


아버지


아, 바보, 천치. 나는 돌았어. 소크라테스의 꼬드김으로 신을 저버리려 하다니. (집 앞에 있는 헤르메스상을 향해서) 하지만 오, 헤르메스 님, 저를 노엽게 생각하지 마시고 벌하지 마시며 지껄이고 수다를 부리는 미친 저를 용서하십시오. 저에게 조언을 해주십시오. 저자들을 법에 고소할까요. 아니면 마음 내키는 대로. 좋아, 법률은 그만두고 이 지껄이기 좋아하는 수다쟁이들의 집에 급히 불을 지르라고 말씀하신다. 야? 크산티아스(노예), 이리 오너라. 사다리와 갈퀴를 가져오너라. 학원의 지붕에 올라가서 주인을 생각한다면 지붕을 뒤집어엎어라. 저자들의 머리 위에 집이 뒤집혀 떨어질 때까지. 자, 불붙은 횃불을 가져오너라. 그들이 어떤 허풍선이건 오늘은 맛을 톡톡히 보여주어야지.



제자1


이야, 큰일이다. (집에서 뛰어나온다.)



아버지


(지붕 위에서) 오, 횃불이여, 타오르는 불길을 뿜는 것은 네 의무다!



제자1


야, 뭘 하니!



아버지


뭘 하느냐고? 다름 아니라 너희 집 서까래와 토론을 하고 있는 거지!


어떤가요?

패륜의 내용이 섞여있어서 이게 뭐람? 하실 수도 있겠지만... 풍자극임을 감안해주세요^^


요즘 뉴스에도 저런 일이 비일비재하죠. 옛 그리스 희극이지만 마음 놓고 웃을 수 없는 각박한 현실입니다.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내 논리에 내가 당한 적이 있나요? 논리적으로 옳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나에게는 맞지 않은 적이 있나요?


2. 말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3. 사람을 말로 설득하는 게 옳은 일일까요?


4. 말을 배운다는 건 나를 더 나답게 만드는 걸까요, 더 교묘하게 만드는 걸까요?


5. 나는 무엇을 위해 배우나요? 무엇을 위해 일하나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진실은 경험되지 않는다. 오직 이야기될 수 있을 뿐이다.


-발터 벤야민-


오늘의 일화입니다.



라캉의 '정어리 통조림'


<라캉의 정어리 통조림>


그는 한 어부 친구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서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가 라캉에게,
“저기 떠 있는 정어리 통조림 캔이 보이냐?” 하고 묻는다.

라캉이 “응, 보여.” 하자, 그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 캔은 널 보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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