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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

「희극의 파편」8. 안톤 체홉 - 방앗간에서 中

by 재준

방앗간 주인


(우울하게) 당신이 왜 이 강에서 고기를 잡는 거요? 누구에게 허락을 받았소?



노인


(조용히) 쓸데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선한 사람들은 개에게도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답니다... (나간다.)



방앗간 주인


(그의 등 뒤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며) 당신 생선이 필요한 거죠? 그렇죠? 그럼 내게서 사쇼, 훔치지 말고!



노인


(등에 자루를 메고 돌아오면서) 당신이 돈을 냈다고 강 전체가 당신 것은 아니잖소. 그저 우리 강변에서 그물을 칠 권리를 받은 거라고.



방앗간 주인


(소리친다.)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요. 강으로 내려가 당신에게 뛰어들 테니...



노인


내 이놈의 방앗간에 오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만, 다른 방앗간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 여기 아니면 이 지방엔 방앗간이라고는 한 곳도 없으니! 차라리 밀을 통째로 먹고 말지! (헛간 벽 뒤로 나간다.)



방앗간 주인


내가 당신이 잡은 생선을 치안판사에게 가져다주겠소. 차가운 유치방 바닥에서 지내게 될 줄 아쇼.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여덟 번째 작품은 안톤 체홉의 '방앗간에서'입니다.


사실 첫 번째 게시글로 안톤 체홉 작품에 대해 다뤘는데요. 사실 그가 단편의 대가인만큼 그의 작품들은 「희극의 파편」에서 다루기 너무나 적합합니다. 또 제가 러시아 문학을 정말 사랑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건 체홉이더라구요.


체홉의 단편은 대체로 짧고 간결하지만, 하나의 문장, 한 줄의 대화, 미묘한 동작 하나에 인간 내면의 복잡한 층위가 녹아 있습니다. 웃기지도 슬프지도 않은 말 한마디에서 울컥해지는 느낌, 그는 그런 대사를 기가 막히게 다루는 작가입니다.



간단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방앗간 주인 비류코프에게 어느날 어머니가 찾아옵니다. 찾아온 이유는... 형편이 어려워 돈을 받으러 온 것이죠. 비류코프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요?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비류코프


(무뚝뚝하게) 시내에서 오시는 길이세요?



어머니


시내에서... 집에서 곧바로 왔지.



비류코프


어머니 병에는, 그런 복합적인 증세는 집에 계시는 게 나아요. 마실도 다니지 마세요. 근데 뭣 때문에 오셨어요?



어머니


너를 보러 왔단다...



헛간의 벽 뒤에서 노인이 등장한다. 그녀에게 인사한다.



어머니


(노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제겐 아들 녀석이 두 놈 있죠. 이 녀석 말고도 또 바실리라는 녀석이 있어요. 시내에 살아요. 얘들은 쌍둥이랍니다. 이 두 놈은 제 혈육이에요. 자식들은 제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겠지만 저는 그렇지가 않답니다. 얘들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어요. (머리에 둘렀던 스카프를 풀며) 다만 이렇게 늙어버려 시내에서 여기까지 오기가 힘드니...



노인


이런 불행이! 참 딱하시네요!



비류코프


(하품하며) 별로 좋지 않은 때에 오셨네요. 어머니, 지금은 카랴지노에 가야 됩니다.



어머니


(한숨을 쉬며) 가거라! 나 때문에 일을 망치면 안 되지... 난 잠시 쉬었다 갈 테니 먼저 가거라. 그런데 바샤와 아이들(형 바실리의 가족으로 추정) 얘기 좀 네게 해야겠다.



비류코프


(우울하게) 아직도 보드카를 처마시나요?



어머니


많이는 아니지만 마시긴 하지. 마신다고 뭐 죄가 될 건 없잖아. 친절한 사람들이 좀 가져다주는 날엔 많이 마시기도 하고... 집이 정말 어렵단다! 바실리를 보고 있자면 정말 고통스럽단다.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고, 아이들은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고 바실리는 부끄러워서 길에 나다니는 것도 꺼린단다. 옷엔 온통 구멍이 나있는 데다 장화도 없이... 우린 여섯 명이서 한 방에 산단다. 가난도 가난도, 이런 가난은 없을 거다. 생각조차 하기 싫구나. 네가 가난을 좀 덜어주면 안 되겠니? 그걸 부탁하려고 왔단다. 네가 이 늙은 어미를 좀 봐주렴. 바실리를 도와줘, 네 형제잖니!



비류코프는 침묵한 채 돌아앉아 담배를 밀어 넣는다.



어머니


(애원하며) 그 녀석은 가난하단다. 근데 너는... 오, 하나님! 넌 방앗간도 있고 채소밭도 있고 생선도 잡아 팔고... 하나님께서 너를 지혜롭게 하시어 재산도 늘려주시고 살찌우게 하시는데... 그런데도 넌 참 외로워 보이는구나... 바실리에게는 자식이 네 명이 있는데다 지 아비 얼굴만 쳐다보고 있단다. 그놈 봉급이라고 해봐야 고작 7루블밖에 되지 않지. 어떻게 식구들을 다 먹여 살릴 수 있겠니? 네가 좀 도와주려무나.



비류코프는 침묵한 채 담배를 피운다.



어머니


좀 나눠주지 않으련? (비류코프는 일어나 방앗간의 물레방아에서 멀어져 간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길, 그래, 주지 말거라. 난 네가 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생략) 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구나. 난 거지 바실리같이 남의 누더기를 걸치고 사는데, 너는 잘살고 있으니.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실 게다, 내가 어떤 영혼을 가졌는지. (고개를 저으며) 오, 비류코프. 질투 어린 시선들이 너를 망쳐버렸구나! 넌 정말 훌륭한 아이다. 똑똑하고 잘생기고, 상인 중의 상인이고... 그렇지만 진정한 인간과는 거리가 먼 것 같구나. 한 번 웃지도 않고, 고운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친절함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으니. 마치 짐승 같은... 그런 얼굴을 하고는! (생략)



비류코프


제발 어리석은 소리 좀 그만하세요, 어머니! (일어나 겉옷을 입는다.) 어쨌든 전 이제 가야 합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



어머니


그래, 잘 지내거라! 하나님과 늘 함께 하고 우리를 잊지 말거라. 잠깐만! (벤치로 다가가 거기에 놓아둔 보따리를 푼다.) 선물을 주고 가마. 어제 목사님 사모님께 들렀는데, 얼마나 대접을 잘 해주시던지... 그래서 이렇게 너를 위해 몰래 남겨두었단다. (아들에게 다가가 손을 뻗으며 조그만 박하 당밀과자를 건넨다.)



비류코프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친다.) 저리 치우세요!



어머니는 당황하여 당밀과자를 떨어뜨린다. 그러고는 조용히 퇴장한다. 노인은 손뼉을 마주치며 소리친다. 오, 맙소사!

비류코프는 노인을 바라보다 어머니를 향해 소리친다.



비류코프


(다급하게) 어머니! 어머니! (중얼거리며) 자, 여기요... (지갑에서 지폐와 은화가 섞인 뭉치를 꺼내며) 받으세요! (손으로 뭉치를 비비며 털어낸다. 그러다 노인을 쳐다본 후 다시 비빈다. 지폐와 은화는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며 다시 지갑 속으로 떨어져 들어간다. 그러자 손에는 20코페이카 은전 한 닢만 남게 되었다. 비류코프는 동전을 들여다보더니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그러고는 만족해하며 어머니에게 건네준다.) 받으세요... 여기 20코페이카.


어떤가요? 이렇게 희곡은 끝납니다.


마지막 비류코프의 행동에서 무엇이 느껴지나요?

쩨쩨하면서도 막상 엄마에게 돈을 주지 않기는 좀 그래서 주긴 주는데, 그것도 돈을 걸러주는 장면을 보세요. 웃픈 상황이네요ㅎㅎ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

다.


적용 질문입니다.


1. 바실리(비류코프의 형)가 비류코프보다 더 나은 점은 뭐가 있을까요?


2. 비류코프 스스로는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첫 장면에서 비류코프는 왜 '(우울하게)' 대사를 치는 걸까요? 작가의 의도는 도대체 뭘까요?


3. 비류코프가 만약 돈을 안 빌려줬다면 그 이후엔 무슨 마음이 들었을까요? 또 빌려줬다고 해서 마음의 갈증이 풀렸을까요?


4. 비류코프를 현대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요? 주변에 비슷한 사람이 있나요? 아니면 혹시 나와 비슷한 점이 있을까요?


5. 노인은 계속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침묵으로 그 모자들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6. 대사 중 웃기지도 않은데 계속 마음에 남는 대사가 있나요? 왜 계속 마음에 남나요?


7. 내 삶에서 가장 비슷했던 순간과 겹쳐본다면 언제였을까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처음엔 비극으로, 두 번째엔 희극으로.


-카를 마르크스-



오늘의 작품입니다.



SSI_20230426092044.jpg 에드워드 호퍼, <이층에 내리는 햇빛>, 1960.



에드워드 호퍼, <이층에 내리는 햇빛>


햇살은 아름답지만 그것을 비추는 건 텅 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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