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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의 파편」9. 페터 한트케 - 관객모독 中

by 재준

우리가 여러분에게 욕설을 하게 되면, 여러분은 우리가 한 말을 그냥 흘려듣지는 못하고 주의 깊게 경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우리 사이 거리는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욕설을 듣게 되면, 여러분의 몸은 부동자세로 경직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을 욕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하는 욕을 할 것입니다. (생략) 우리는 다만 청각적 이미지를 만들 뿐입니다. 여러분은 사전에 주의를 받았으니까, 욕설을 들어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욕설을 구성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쉬지 않고 '너'라고 말할 것입니다. 너희들이 우리 욕설의 주제입니다. 너희들은 우리가 하는 말을 경청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들, 눈딱부리들아...



(생략)

너희들은 모두가 똑같은 모습이었다. 너희들에게 오늘은 좋은 하루였다. 너희들은 서로 훌륭하게 연기했다. 너희들은 삶의 이야길 듣고 배웠다. 멍청이들아, 막돼먹은 인간들아, 무신론자들아, 부도덕한 인간들아, 떠돌이 사기꾼들아, 불결한 유대종자들아.



너희들은 우리에게 아주 새로운 앞날을 보여줬다. 너희들은 이 작품과 잘 타협했다. 너희들은 전보다 더욱 성장했다. 너희들은 자유롭게 연기했다. 너희들은 정신적으로 내면화되었다. 우글거리는 인간들아, 서양 문화의 무덤 파는 자들아, 반사회적인 인간들아, 하얗게 칠해진 무덤 같은 족속들아, 악마 일당들아, 악당 무리들아, 무방비한 사람들의 목덜미를 쏘는 사격 전문가들아...



(생략)

강제 수용소의 범죄자들아, 부랑자들아, 황소 같은 고집불통들아, 전쟁광들아, 짐승 같은 인간들아, 공산당 떼거리들아,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들아, 나치의 돼지들아.



(생략)

도살자들아, 정신병 환자들아, 어중이떠중이들아, 영원히 과거에 갇힌 인간들아, 대중에 영합하는 인간들아, 얼간이들아, 추잡한 인간들아, 어리석은 인간들아, 지조 없는 인간들아.



(생략)

허풍쟁이들아, 맹목적인 애국자들아, 유대인 같은 자본가들아, 혐오스러운 상판대기들아, 어릿광대들아, 천박한 인간들아, 젖비린내 나는 인간들아, 매복한 저격수들아, 실패한 작자들아, 싸구려 작자들아, 망나니 같은 작자들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작자들아, 살아갈 가치도 없는 작자들아, 구더기 같은 작자들아, 오락실 사격장의 허수아비들아,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작자들아.



(생략)

멍청하게 서서 구경하는 꼴통들아, 조국도 없는 불쌍한 작자들아, 사이비 혁명가들아, 찌꺼기 같은 작자들아, 자기 나라를 헐뜯는 작자들아, 내면세계로 이민 간 작자들아, 패배주의자들아, 수정주의자들아, 보복주의자들아, 군국주의자들아, 평화주의자들아, 파시스트들아, 주지주의자들아, 허무주의자들아, 개인주의자들아, 집단주의자들아, 정치적인 미성년자들아, 훼방꾼들아, 인기나 노리는 작자들아, 반민주주의자들아, 자학이나 일삼는 작자들아, 박수나 구걸하는 작자들아, 대홍수 이전에나 있었을 괴물 같은 작자들아, 돈에 팔려 박수나 치는 작자들아, 파벌이나 일삼는 작자들아, 천민들아, 돼지처럼 탐욕스러운 작자들아, 노랑이들아, 극빈자들아, 불평분자들아, 아첨꾼들아, 지적인 프롤레타리아들(자본주의 노동자)아, 허풍쟁이들아, 아무것도 아닌 작자들아, 쓸모없는 작자들아...



(생략, 이밖에 많은 욕설을 퍼붇고는)


여러분은 여기서 환영받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아홉 번째 작품은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입니다.


제목도 없이 시작부터 욕설로 도배되어 있어서 깜짝 놀라셨나요?^^

죄송합니다. 작품 자체가 이래서 저도 이렇게 구성을 해봤습니다.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1942.– )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시나리오 작가이며,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현대 유럽 문학의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작품으로서 언어실험을 하는 작가입니다.

그 중 <관객모독>은 전통적 희곡의 형식과 관습을 거부하고 파격적인 언어로 현실의 위선과 부조리를 드러냈습니다.


이 작품은 네 명의 배우들이 출연한다고 적혀있긴 하지만, 등장인물, 갈등, 상황, 무대 장치가 없습니다.

희곡의 형식이 이렇다니, 믿겨지시나요?


내용이랄 것도 없습니다.


희곡과 연극의 기본적 형식을 부정했습니다. 어떠한 이야기의 기본 구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는.


기본적인 기승전결이 있고, 처음엔 지루하다가도 인상깊은 장면을 찾으면 감탄을 하고 칭찬을 하고, 극적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상징화된 의미를 찾고... 그러한 독자들, 관객들의 전통적 향유 방식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말그대로 <관객모독>인 셈이죠.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관객들이 극장 안으로 들어오면, 연극이 시작되기 전 느껴지는 친숙한 분위기가 그들을 맞이한다. 닫힌 막 뒤에서는 무슨 물건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을 관객들은 무다 장치를 밀거나 당기는 소리로 착각할 수 있다. 무대를 가로질러 책상을 끈다거나 혹은 의자 두어 개를 세웠다가 다시 옆으로 가져가는 그런 소리로 착각할 수 있다. 첫째 줄에 앉아 있는 관객들 역시 막 뒤에서 소곤거리는 대화를 일꾼들의 소리로 착각할 수 있다. 다른 연극들에서 막이 오르기 전 실제 무대 장치 도구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테이프로 녹음해서 사용하는 것이 어쩌면 더 적합할 수 있다. 이 소리들이 좀 더 잘 들릴 수 있도록 음량을 높일 수도 있다. 이 소리를 특색 있고 단순하게 만들어서 시끄러운 가운데 점차 질서와 규칙이 나타나도록 한다.

(생략)

좌석 안내원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부지런함을 더욱 완전하게 수행하고, 보다 예절 바르고 격식에 맞게 움직이고, 그들에게 익숙한 것을 보다 세련되게 속삭일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분위기 조성에 영향을 줄 것이다. (생략) 좌석 안내원들이 문을 닫는 동작은 특별히 엄숙하고 눈에 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좌석 안내원일 뿐이다. 어떠한 상징적 의미도 생겨나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희곡이 시작되는데 여기까진 기본적인 희곡처럼 무대 설명이 이뤄진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극이 시작되었는데도 똑같은 문체와 구성을 유지할 뿐입니다.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 작품은 일종의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들어 본 적 없는 것은 여기서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본 적 없는 것은 여기서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 극장에 오면 늘 보았던 것을 여기서는 전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 극장에 오면 늘 들었던 것을 여기서는 전혀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전에는 눈으로 보았던 것을 귀로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전에 여기서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을 귀로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눈으로 보았던 연극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호기심은 충족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눈으로 보았던 연극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연극이 공연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환상이 없는 연극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기대했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무엇인가 다른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여러분은 대상들을 기대했었습니다.

여러분은 대상들을 기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분위기를 기대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다른 세계를 기대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다른 세계를 기 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기대했었습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여기서 무엇인가 듣기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 여러분은 무엇인가 다른 것을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생략)



여러분은 남이 사는 대로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남이 가는 대로 똑같이 가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실감 나게 체험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어떤 음모도 체험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체험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무런 가정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무대가 있다는 것을 아실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기대에 차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기대에 차 등을 뒤로 기댈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단지 연기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아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사고도 만들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건을 추적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함께 연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연기가 이루어질 뿐입니다. 이것은 언어극입니다.



(생략)



우리를 비추는 불빛이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도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옷은 아무것도 표시하지 않고, 무엇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지도 않고,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습니다. 이 옷은 여러분에게 어떤 다른 시간을 암시하지도 않고, 어떤 다른 기후를, 어떤 다른 계절을, 어떤 다른 위도를, 이 옷을 입을 어떤 다른 동기를 암시하지도 않습니다. 옷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태도 역시 여러분에게 무엇인가 암시하는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코 세계극이 아닙니다.



(생략)



여기 무대 위에는 지금 질서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질서를 보여 줄 만한 어떤 물건도 없습니다. 세계는 여기서 안전한 것도 엉망이 된 것도 아닙니다. 여기는 결코 세계가 아닙니다. 여기에 소도구들의 자리는 없습니다. 무대에서 소도구들의 자리는 지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리가 지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 위쪽에는 지금 질서가 없습니다. 물건들의 위치를 표시한 분필 자국도 없습니다. 인물들의 위치를 알려 주는 표시도 없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좌석과는 반대로 여기서는 아무것도 자기 자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물건들에게는, 거기 아래쪽에 여러분 좌석이 자리 잡은 것처럼, 어떤 확정된 자리가 없습니다. 세계가 무대가 아닌 것처럼 이 무대는 세계가 아닙니다.



(생략)



우리는 말만 하기 때문에 그리고 허구적인 것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치 않거나 모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기 때문에, 이곳에 두 차원 혹은 여러 차원은 존재할 수 없고 연극 속 연극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몸짓도 하지 않고,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고, 아무런 연기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단지 말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이 지는 다양한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 이미 언급한 죽음의 표정과 몸짓으로 지금 현재 통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교의 몸짓과 표정을 동시에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중 의미를 지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중 의미를 지닌 채 연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세상에서 떼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문학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최면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허상을 보여 주며 믿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거짓 싸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두 번째 자연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연극을 보는 것은 최면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아무 것도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눈을 뜬 채 꿈꿀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꿈의 비논리로 무대의 논리를 대하도록 강요받지도 않습니다. 무한히 펼쳐질 수 있는 여러분의 꿈은 좁은 무대 위에서 제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조리한 여러분의 꿈은 무대의 현실적인 규칙에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꿈도 현실도 상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에 대해서도 죽음에 대해서도, 사회에 대해서도 개인에 대해서도, 자연에 대해서도 초자연에 대해서도, 쾌락에 대해서도 고통에 대해서도, 현실에 대해서도 연극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우리에게서 어떤 비가(슬픈 노래)도 불러내지 못합니다.



(생략, 온갖 욕설을 퍼붇고는)



여러분은 여기서 환영받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곧 막이 내려온다. 그러나 내려와서는 닫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의 움직임과는 관계없이 즉시 다시 올라간다. 배우들은 특별히 누군가를 주시하지 않고 그냥 서 있는 자세로 관객 쪽을 바라본다. 스피커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우레 같은 박수와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진다. 게다가 어느 비트 밴드 콘서트에서 녹음된 열화 같은 관객 반응을 스피커로 다시 틀 수도 있다. 엄청나게 울부짖는 소리가 관객들이 나갈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마지막으로 막이 내려온다.



어떤가요? 이런 방식으로 희곡은 끝납니다.


페터 한트케는 지독한 반골이자 T기질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좀 지루하긴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주옥같긴 합니다.ㅎㅎ


이런 작품은 사실 정독하면서 읽기보다는 책을 소장하면서.. 퇴고를 한다거나, 글에 대한 경계심? 자기 검열의 욕망을 철저히 하고 싶을 때 쓱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읽어버리고... 이렇게 활용하는 것이 좋아보입니다. (제 주관적 생각입니다.^^)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

다.


적용 질문입니다.


1. 영화나 문학 작품을 보면서 특별히 기대하는 나만의 요소가 있나요?


2. 좋은 작품이란 뭘까요? 내 취향에 맞는 작품은 좋은 작품일까요?


3. 내 인생을 바꾼 작품이 있나요? 그것을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꼭 지금보다 아쉽게 살고 있을까요?


4. 훌륭했던 작품의 저자가 실제 말하는 모습을 봤을 때 실망했던 적이 있으신가요?


5. 글을 잘 쓴다는 건 뭘까요? 나만의 기준이 있으신가요? 참고로 페터 한트케는 이 작품을 쓸 때 '오직 현실에서 쓰이는 단어와 문장'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따랐습니다.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사회는 그 자신의 변태/뒤집음을 모른다.


-롤랑 바르트-


오늘의 일화입니다.



<연암 박지원의 하늘 천(天) 자>




왜 하늘 천(天) 자는 푸르지 않습니까?


마을의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주는데, 게으름을 피우며 읽기를 싫어하기에 한마디 나무랐습니다.


그랬더니 그 애가 “하늘을 보니 푸르고 푸른데 ‘하늘 천’(天) 자는 왜 푸르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천자문 읽기가 싫은 겁니다.”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아이의 총명함은 한자를 만들었다는 중국의 창힐을 기죽게 할 정도입니다.


-연암 박지원(1737~1805) (答蒼厓, ‘연암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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