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워렌 부인의 딸)
예, 엄마. (저녁 문제로 되돌아가서) 모두 몇 명이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자, 다른 분이 식사하실 때 두 분은 기다리셔야 되겠어요. 식기가 네 벌뿐이니까요.
프레드
아, 괜찮아요. 난.
비비
오래 걸었으니 시장하실 거예요, 프레드 씨. 바로 드시는 게 낫겠어요.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한 분만 저하고 같이 기다리면 돼요. 프랭크, 배고프니?
프랭크
전혀 안 고파. 입맛을 잃었거든.
워렌 부인
(크로프츠에게)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기다릴 수 있겠죠.
크로프츠
젠장, 아까 티타임 후론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샘이 기다리면 안 돼?
프랭크
불쌍한 우리 아버지를 굶길 작정이세요?
목사(프랭크의 아버지)
(퉁명스럽게) 내 입으로 말하게 해 다오, 인마. 저는 온전히 기다릴 수 있답니다.
비비
(단호히) 그러실 필요 없어요. 둘이면 되니까요.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열네 번째 작품은 조지 버나드 쇼의 '워렌 부인의 직업'입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이자 비평가, 사회주의자이며, 근대 희곡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뛰어난 유머, 사회비판, 지적인 대사로 가득한 작품들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925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영화'피그말리온'의 각색으로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하여 노벨상과 오스카상을 모두 받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선 제목을 보시죠. 《워렌 부인의 직업》(Mrs. Warren’s Profession, 1893)
왜 job이 아니라 profession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워렌 부인의 직업은 매춘부였습니다.
이 희곡은 가난과 사회 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워렌 부인'과, 그 선택으로 큰 부를 이루고 오히려 자부심을 느끼는 그녀, 그리고 그런 삶과 상반된 삶을 살고 싶은 딸 '비비' 사이의 갈등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래서 저는 profession을 직업보다는 직업 정신, 자부심, 소명 같은 단어로 이해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희곡의 하이라이트는 워렌 부인의 자부심 넘치는 대사이니까요.
<워렌 부인의 직업 정신> 뭔가 더 그럴 듯 하지 않나요?ㅎㅎ
제가 선별한 장면은 워렌 부인이 딸에게 자신의 직업을 22년만에 밝히는 장면입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워렌 부인
너희 외할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아니?
비비
아니요.
워렌 부인
당연히 모르지. 난 안다. 스스로 과부라던 네 외할머니는 조폐국 부근에서 생선튀김가게를 해서 네 딸을 키우셨다. 우리 둘 즉, 나와 리찌 언니는 친자매간인데 외모도 체격도 좋았단다. 우리 아버지는 풍채가 좋은 분이었나 보더라. (생략) 우리는 교회학교에 다녔는데, 거기서 품위 있는 태도를 익혔고 그 덕분에, 아무것도 모르고 갈 데도 없는 아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자부하게 되었지. (생략) 목사는 나한테 금주 식당의 부엌데기 자리를 구해 줬단다. 거기는 손님들이 원하는 건 뭐든 배달 주문시켜 주던 곳이야. 그다음엔 여급이 되었고, 그다음엔 워털루 역에 있는 바에 나갔지. 하루에 열네 시간씩 술 나르고 잔 씻는 일을 해서 숙식 해결에다 주당 4실링을 받았지. 당시의 나로선 엄청난 승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지독히 추운 밤이었어. 너무 피곤해서 비몽사몽이었는데, 스카치위스키 반 병을 사러 온 사람이 바로 리찌 이모였다. 긴 모피 망토를 걸치고 우아하고 편안한 모습에다 지갑엔 금화가 두둑이 들었더구나.
비비
우리 리찌 이모가!
워렌 부인
그래. 있어서 득이 되는 이모기도 하지. 지금은 윈체스터 대성당 부근에서 새 삶을 살고 있단다. 거기선 엄청 존경받는 귀부인으로, 지역 무도회에 처녀들을 데뷔시키는 샤프롱 일을 하고 있다. (생략) 빼어난 용모를 갖춘 나를 본 이모는 바 저편에서 이렇게 말하더구나. "이 바보야, 도대체 왜 여기서 네 건강과 외모를 남 좋은 일에 다 써 버리는 거냐?" 당시 이모는 브뤼셀에 업소를 차리려고 돈을 모으는 중이었단다. 이모는 둘이 힘을 합치면 돈을 더 빨리 모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나한테 돈을 빌려줘서 시작할 기회를 준 거야. 난 열심히 모아서는 맨 먼저 이모한테 빌린 돈부터 갚았다. 그리곤 이모하고 동업자로서 사업에 뛰어든 거다. 내가 그래선 안 될 이유가 있었겠니? 브뤼셀 업소는 정말 고급으로, 여자가 몸담기엔 앤 제인(납 중독으로 죽은 워렌 부인의 이부자매)이 중독된 공장보단 훨씬 나은 곳이었지. 업소에선 어떤 여자애도, 내가 금주식당의 부엌데기로나, 워털루의 술집 또는 집에서 받은 대접을 받지 않았단다. 네가 이모의 입장이었다면 나를 그런 처지에 내버려 둬서 고된 일로 마흔도 되기 전에 늙어 빠지게 했겠니?
비비
(이젠 제법 관심이 생겨서) 아니요, 하지만 왜 그런 사업을 택한 거죠? 돈을 모으로 수완만 있으면 아무 사업에서나 성공했을텐데요.
워렌 부인
그렇지. 돈을 모아야지. 하지만 여자가 다른 어떤 사업을 해서 돈을 모을 수 있겠니? 너 같으면 주당 4실링 받아서 옷도 갖춰 입으면서 돈을 모을 수 있겠니? 넌 못 한다. 외모가 평범해서 더 벌지 못하는 처지라면 당연히 안 되지. (생략) 오로지 좋은 외모로 남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능력밖엔 없었지. 우리가 남들이 우릴 상점 종업원이나 술집 여급으로 고용해서 득 보게 놔둘 바보로 보이니? 겨우 입에 풀칠만 하는 처지가 아니라, 직접 저들과 거래해서 이익을 온통 우리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비비
두 분의 처지를 사업적 관점에서 정당화하셨군요.
워렌 부인
그래. 아니면 다른 어떤 관점에서든. 존중받을 만한 여자애로 길러져서 할 일이란 뭐니? 돈 많은 남자의 환상을 붙잡아서 결혼하고 그 재산의 덕을 보는 것 빼면 말이다. 결혼식이 사안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기준이기라도 한 듯이! 아, 세상의 위선이 구역질난다! 이모와 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일하고 돈 모으고 계산해야 했단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행운이 끝없이 이어질 줄 알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술에나 절어 사는 년들처럼 처량한 신세가 됐겠지. (기운이 넘쳐서) 난 그런 인간들을 경멸한다. 그들은 개성이 없지. 여자들한테 진절머리 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개성결핍이란다.
비비
이보세요, 엄마. 솔직해지세요! 개성 있는 여자면 그런 방식으로 돈 버는 걸 엄청 싫어해야 마땅하다고 말하시지 않았던가요? (생략) 엄마는 여전히 그 일을 할 만한 일이라고 여기시네요. 돈을 버니까.
워렌 부인
물론 가난한 여자애로선 할 만한 일이지. 유혹을 이겨낼 수 있고 외모도 번듯하고 품행도 바르고 분별력이 있기만 하다면 말이다. 자기한테 열린 다른 어떤 직장보다 훨씬 낫지. 난 늘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비비야, 여성이 더 나은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는 게 옳을 수는 없단다. 지금 현실이 그르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옳든 그르든 현실이 이러니, 여자애로선 현실에서 최선을 찾아야지. 그러나 물론 이 일은 숙녀로선 할 만한 일은 아니다. 네가 이 길로 들어선다면 바보다. 하지만 내가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역시 바보였달 수밖에.
비비
엄마, 지금 우리 둘 다 예전에 엄마가 힘들었던 시절만큼 가난하다고 칩시다. 그럼 엄만 나한테 워털루 바에 나가라거나, 노동자한테 시집가라거나, 공장에 다니라고 충고하지 않을 게 확실해요?
워렌 부인
당연하지. 넌 도대체 날 어떤 엄마로 보는 거냐? 그런 굶주림과 노예상태에서 너라면 어떻게 자존심을 지켰겠니? 자존심이 없는데 도대체 어떤 여자가 가치 있고, 어떤 삶이 가치 있다는 말이냐! 좋은 기회를 가졌던 다른 여자들이 수렁에서 헤매고 있을 때, 난 왜 독립해서 딸을 고등교육까지 시켰겠니? 자신을 존중하고 자제하는 방법을 언제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생략) 얘야, 넌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 말에 따라 잘못된 길로 가지 마라. 여자가 품위 있게 살 방도를 마련할 유일한 길은 자기한테 잘 대해 줄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남자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와 신분 수준이 비슷하면 결혼하는 것이고, 남자보다 훨씬 처지면 포기해야지. 왜 그래야 하느냐고? 그런 결혼은 여자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게 못된다. 런던 지역의 딸 가진 어느 귀부인에게라도 물어보렴. 그러면 똑같이 말해 줄 거다.
어떤가요? 내용이 흥미롭지 않나요? ^^
제 게시글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희곡을 읽다보면 이런 내용은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답니다. 생각해보니 희곡을 떠나서 모든 고전, 문학 작품의 근간은 여자와 남자, 결혼이야기, 가난, 외면할 수 없는 현실, 비루한 욕정 등등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런 걸 떠나서도 내용 자체가 재밌네요.ㅎ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의 기반이,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마련된 것인가요?
2. 내가 가진 도덕적 잣대는 안전하고 안정된 위치에서만 부릴 수 있는 사치인가요?
3.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옳지 않은 방식으로 무언가를 해줬다면 나는 모른 척 넘어가나요, 혹은 그 사람을 비판하나요?
4. 워렌 부인이 딸 비비에게 외모가 그리 이쁘진 않다, 라고 말했을 때 비비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씁쓸했을까요, 무감각했을까요?
5. 4번의 장면은 웃겼을까요? 민망했을까요? 가장 웃긴 장면이, 사실은 가장 부끄럽고 진지한 상황이었던 적은 없었나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오래된 연인을 기억할 때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
-발터 벤야민-
오늘의 속담입니다.
늙은 말이 길을 안다
늙고 낡은 존재가 지닌 깊이와 가치
워렌 부인의 비루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생존의 리듬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