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그량쥬
자네 생각엔 어때? 흡족했나?
뒤 크롸지
솔직히 말해서... 난 그렇지 못한 것 같네.
라 그량쥬
자네니까 말이지만 난 아주 잡쳤어. 그 여자들처럼 잘난 체하는 시골뜨기들은 처음이야. 게다가 우리들보다 더 멸시당한 사내들은 아마 없을 걸세. 우리한테 자리를 권하는 것도 마지못해 하는 듯한 표정이었으니까. 자기네들끼리 귓속말로 속닥거리질 않나, 거리낌없이 하품을 하질 않나, 나중엔 '지금 몇 시나 됐죠?' 하고 연신 묻지를 않나. 하여간 그런 여자들은 처음 보았다니까. 우리들이 물어 보는 말에도 건성으로 '네.' 아니면 '아니오'란 말뿐이 아니었나? 세상에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도 그보다 못한 대우는 받지 않을 거야.
뒤 크롸지
자네 기분이 몹시 상한 모양이군?
라 그랑쥬
물론이지, 잡쳤어. 그 여자들에게 당한 만큼 그 불손한 행동에 복수를 하고 싶어. 난 그녀들이 왜 우리를 깔보게끔 됐는지 알고 있네. 그 빌어먹을 잘난 체하는 풍조가 파리뿐만 아니라 시골에까지 퍼져서 되지 못한 못난 것들까지도 덩달아 뼈 속까지 물들었지 뭔가. 이 가소로운 여자들도 거기에 빠져 있단 말이야. 한마디로 말해서 그네들의 생리란 고상한 체 콧대를 세우고 우아한 교태를 지어내는 거야. 대접을 잘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잖나?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날 믿는다면 말야. 우리 둘이서 멋진 연극을 꾸며 그것들의 그 어리석음을 톡톡히 곯려주고 말이지, 또 자기네들의 분수를 알게 해주잔 말야.
뒤 크롸지
어떻게?
라 그랑쥬
내 하인 중에 마스까리유라고 제법 기지가 있는 놈이 있거든. 한데 녀석은 요즘의 유행에 좇아 유식한 체 까불어 대고 게다가 귀족 행세까지 하려 드는 당돌한 놈이지. 그뿐인 줄 아나. 멋진 태도로 여자를 낚는 거나 우아한 시를 읊을 줄 안다는 것에 자부를 하면서 말이야, 아예 다른 하인들은 야만적인 놈들이라고 업신여기고 있지 뭔가.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열다섯 번째 작품은 몰리에르의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입니다.
배우이자 극작가이자 지식인이자 멋쟁이었던 희극의 대가 몰리에르(Molière, 본명: 장-바티스트 포클랭 Jean-Baptiste Poquelin, 1622년 1월 15일 ~ 1673년 2월 17일)는 프랑스 출생 작가입니다.
다소 거친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위선과 어리석음,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귀족 뒤 크롸지와 라 그량쥬는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마들롱과 까또스라는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에게 선 자리를 보다가 거절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녀들을 복수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들의 하인 마르까리유와 죠들레를 후작으로 위장시켜 화려한 말솜씨로 두 아가씨를 유혹하게 합니다. 마들롱과 까또스가 하인들에게 속아 마음을 완전히 열었을 무렵, 뒤 크롸지와 라 그량쥬가 나타나 하인을 두들겨 패며 모든 진실을 폭로합니다.
제가 선별한 장면은 마들롱과 까또스가 그들만의 연애관을 이야기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 즉 뒤크롸지와 라 그량쥬가 모든 실상을 까발리는 장면입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고르쥐뷔스(마들롱의 아빠)
밤낮 그짓들이로구나. 내려들 오라고 해라. (혼잣말) 고년들이 그놈의 화장품으로 날 아예 망쳐 버릴 작정인가? 온 집안이 계란 흰자다, 생 우유다, 또 뭐다 해서 잔뜩 널려 있으니 말이야. 우리가 이곳으로 온 후에 그것들이 쓴 기름만도 돼지 열두 마리는 되고도 남을 거야. 우유만 해도 그렇지. 하인 네 놈이 온종일 양의 다리 곁에 죽치고 있으면서 날라다 바칠 지경이니 원. (마들롱과 까또스에게) 너희들은 콧잔등을 문질러대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돈을 쓰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그런데 너희들이 그 신사 양반들께 어떻게 대했는지 말이나 들어 보자. 왜 그렇게 기분이 왕창 잡쳐서 가버리게 했느냔 말이야. 내가 너희들의 신랑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니 그런 줄 알고 잘 대접하라고 미리 말하지 않더냐?
마들롱
아이 참 아버지도. 신사도를 모르는 그 사람들의 촌스런 태도를 어떻게 우리가 좋게 대하란 말이에요.
까또스
우리같이 유식한 여자가 어떻게 그런 무식한 사람들을 좋아할 수 있겠어요? 아저씨.
고르쥐뷔스
도대체 어디가 어때서 싫다는 게냐?
마들롱
사랑의 기교를 모르는 사람들인가 봐요. 만나자마자 결혼말을 끄집어 내니 말이에요.
고르쥐뷔스
아니 그럼 무엇부터 시작해야 한단 말이냐, 응? 그런 건 칭찬할 만한 태도야. 그 이상 더 필요한 말이 또 뭐가 있어. 만나자마자 결혼 얘기를 꺼내는 것은 자기들의 의사를 솔직히 표시한 증거가 아니겠냐?
마들롱
아유, 아버지! 그 말씀은 너무 상스러워요. 그런 투로 말씀하시다니, 듣기만 해도 수치스러워요. 아버진 좀 근사한 말투를 배우셔야 되겠어요. (생략)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 같다면 소설은 금방 끝장이 나고 말겠지요. 씨류스와 망단느가 만나자마자 처음부터 결혼을 했고 아롱스와 끌레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게 되었다면 그 훌륭한 소설의 꼴이 어떻게 되었겠어요?
고르쥐뷔스
아니, 무슨 얘길 하는 거냐?
마들롱
아버지! 결혼이란 건 연애사건 한번 없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거예요. 언니도 동감이죠? 그러니 애인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멋있게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해요. 부드럽고도 열정적으로 말예요. 그리고 구애는 격식을 갖춰야 해요. 우선 성당이나 산책길, 혹은 어떤 공식 석상에서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랑의 감정이 움텄다든가, 아니면 친척이나 친구에 의해 숙명적으로 그 여자의 집에 안내되어서 결국 그 집에서 나올 때는 아주 꿈꾸는 듯, 애수에 잠기는 듯해야 되죠. 그렇게 되면 당분간은 자기의 애정을 감추면서 몇 번 그녀를 방문하고 환심을 사려고 애를 쓰고... 드디어 그의 애정을 고백할 날이 되면 어느 정원의 조그만 오솔길이나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을 택해야 해요. 고백을 받으면 여자는 이내 화를 내야 되는데 그래야만 요조숙녀다운 표시가 되거든요. 그리고 일부러 그 남자를 만나지 않죠. 그 동안 애인은 우리들을 달래서 은연중 사랑에 이끌려 들게 하여 그 귀하고 힘든 고백을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돼요. 그때 뜻하지 않는 사건이 생겨 싹트는 사랑을 방해하는 적수가 생기고 아버지의 반대라든가 허위 소문 때문에 질투를 하여 고통과 절망에 빠지는 단계가 오고, 이런 용의주도한 진행이야말로 세련되게 여자의 환심을 사려는 데 업어서는 안 될 최선의 방법이죠. 만일 단도직입적으로 결혼에 이르고 사랑하는 것이 결혼 계획을 짜는 것밖에 안 된다면 소설을 거꾸로 읽는 거지 뭐예요? 아버지! 한마디만 더 하겠어요. 그 사람들의 태도란 정말로 야비해요. 그런 일이 저에게 있었다는 생각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려 해요.
고르쥐뷔스
도대체 너 지금 무슨 말을 씨부렁거리고 있냐? 영 딴 나라 말 같구나.
까또스
정말이에요, 아저씨. 그 말이 맞아요. 여자의 환심도 살 줄 모르는 주제에 잘 대접받기를 바라다뇨. 전 그 사람들이 '애정 지도서'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처음에는 연애편지로 시작해서 다음에는 좀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발전시키고 결국 열렬한 사랑에 빠져 아름다운 시를 보내다든가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먼 나라 얘기예요. 그 사람들의 인품을 보면 알 수 있죠. 더구나 호감이 가는 인상은 찾아볼 수도 없었어요. 애인의 집을 방문하는 데 온통 낡아빠진 바지에다 깃도 없는 모자를 쓰고 머리는 흐트러진 채 리본조차 달지 않은 옷을 입고 오다니... 글쎄 어떤 남자가 그럴 수가 있겠어요. 그 촌스런 몸치장에다 대화는 싱겁기 짝이 없고... 정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 사람들 가슴에 단 장식은 싸구려가 뻔하고 바지 길이는 또 어지나 짧은지 잘 봐줘서 반 자쯤이나 될까?
(생략)
마로뜨(하인)
어떤 하인이 왔는데유, 아씨들이 계신지 어찐지 묻는구만유. 자기 주인 나리께서 아씨들을 뵙자는가 봐유.
마들롱
저런 촌뜨기. 제발 고상한 말솜씨 좀 배울 수 없니, 이 바보야! '여기 한 하인이 왔는데, 그가 아씨들이 지금 방문을 받을 수 있는 편안한 상태에 계신지 어쩐지를 묻는군요.' 이렇게 말하는 거야. 자, 해봐.
마로뜨
얼레! 그런 유식한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어유. 지가 워디 르 그랑쉬르에 나오는 채락인가 뭔가 하는 걸 배웠어야지유.
마들롱
맙소사! 그따위로 말을 하다니! 그런데 그 하인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라더냐?
마로뜨
마스까리유 후작이라고 그러데유.
마들롱
뭐? 어머, 언니, 후작이래!
(생략, 마스까리유는 악사들을 불러 춤을 춘다.)
마스까리유
서둘러 무도회를 여니 이렇군요. 그러나 언젠가는 격식을 갖춘 무도회를 열어서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다. 악사들은 왔나?
까또스
자, 여러분 자리를 잡읍시다. (마스까리유는 전주곡에 맞춰서 혼자 춤을 춘다.) 랄라라, 랄랄라...
마들롱
어쩜 저렇게 우아한 허리를 가졌을까!
까또스
또 저렇게 정확하게 추는 맵시라니!
마쓰까리유
(마들롱에게 춤을 청하며) 솔직히 말씀드려 오늘은 내 발이 이끄는 대로 최신식 춤을 마음껏 출 참입니다. 자, 악사들, 박자를 맞춰라. 박자를! 오! 무식한 것들 같으니! 저 박자에 맞춰선 도저히 춤을 출 도리가 없군! 병신 같은 녀석들아! 너희들은 박자에 맞춰 연주할 줄도 모르느냐? 랄랄라, 랄라라, 랄랄라... 박력 있게 해. 이 촌구석의 악사들 같으니!
라 그랑쥬
(나타나) 이런 몹쓸 녀석들! 여기서 뭣들 하고 있는 거냐? 세 시간 전부터 네 놈들을 찾아다녔는데.
마스까리유
(맞는 시늉을 하며) 아야! 아야! 아야! 나리께서 이렇게 때린다는 조항은 저희들 각본에 없었는데요.
죠들레
아야! 아야! 아야!
라 그량쥬
귀족 행세를 하려 들다니, 고얀 놈들 같으니라구!
뒤 크롸지
맛 좀 톡톡히 봐라. (그들은 나간다.)
(생략)
마들롱
이렇게 난리를 피우다니 무슨 무례한 짓이에요. 점잖은 숙녀 집에서...
뒤 크롸지
뭐라구요? 아가씨들, 우리들의 종놈들이 우리보다 더 대우를 받는데, 어찌 우리가 참을 수 있겠소? 더구나 그놈들이 우리 돈으로 당신들께 사랑을 구하고 무도회를 열고 하는데...
마들롱
예? 당신들의 하인이라구요?
라 그랑쥬
그렇소, 우리들의 하인이오. 그러니 당신들이그 녀석들을 꾀어 놀아나게 했다는 것은 아름답지도 고상하지도 못한 일입니다.
마들롱
어머나! 무슨 무례한 말씀이에요!
라 그량쥬
당신들의 눈길을 끌려고 하인 주제에 감히 우리들의 옷을 걸치다니 용서할 수 없죠. 그러니 만일 아가씨들이 그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면 그 녀석들의 알몸뚱이를 사랑해 보시지요, 자, 어서 그놈들의 옷을 벗겨라.
죠들레
우리의 연극도 끝장이구나!
마스까리유
후작이라는 칭호도, 자작의 지위도 끝장이 났구나!
(생략)
고르쥐뷔스
망할 계집애들! 이게 무슨 망신이냐, 그래? 지금 그 창피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방금 나간 그 신사분들에게 말이다.
마들롱
아, 아버지! 소위 신사라는 사람들이 여자에게 이렇게 혹독하게 모욕을 할 수가 있겠어요?
고르쥐뷔스
그야 좀 심하긴 했지만 싸지 싸. 못된 것들 같으니! 그분들은 너희들의 푸대접에 아직 분이 풀리지를 않았단 말야. 이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지?
(생략, 악사가 고르쥐뷔스에게 다가간다.)
비올롱 악사
주인 양반, 별 수 있습니까. 사태가 이렇게 됐으니 영감님께서 돈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가요? 영화 '기생충'의 내용과 비슷해보이기도 하네요.^^
가짜들은 오히려 더 진짜처럼 행동하고, 진짜들은 오히려 가짜처럼 보이니... 부자들이 저렴한 티셔츠 하나만 입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까요?
그런 것을 다 떠나서도 마들롱과 까또스의 대화는 참 흥미로운 내용이긴 합니다. 모든 것이 웃픈 현실로 다가오네요.ㅎㅎ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만약 마들롱과 까또스가 내 친구라면 그들을 속으로 좋아하나요, 부담스러워 하나요?
2. 그들의 얄팍스러운 대화는 꽤 진지했을까요, 혹은 장난기가 조금 섞였을까요? 스스로 진지한 척하는 순간이 있었나요? 그 순간은 얼마나 슬펐나요?
3. 사람이 허세를 부리는 이유는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서일까요, 아니면 도무지 그것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일까요?
4. 마들롱과 까또스가 바보 같아 보이시나요, 꽤 세속적이지만 현명한 인물처럼 보이시나요?
5. 어리석음은 지식의 결핍에서 오나요, 감정의 과잉에서 오나요?
6. 복수의 연극이 끝나고, 누가 진짜로 외로운가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승리의 순간에 샴페인은 당연하다. 그건 패배의 순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윈스턴 처칠-
오늘의 민요입니다.
(출처: 히비스TV)
귀족들이 떠난다. 웃으며, 승자의 표정을 짓고.
하인들도 빠져나간다. 무대엔 조명만 남는다.
마들롱은 말이 없다. 까또스도 입을 닫는다.
대신, 그들은 천천히 리듬을 따라 걷고, 손을 흔들고, 허리를 비튼다.
그것은 춤이라기보다, 폭로와 조롱이 끝난 뒤.
마치 ‘카이마나힐라’ 어딘가에서 바람과 파도만 바라보며,
슬픔을 숨기지 않는 몸짓으로 훌라를 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