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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MR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희극의 파편」 번외 - 지루한 반복

by 재준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잠시 「희극의 파편」 시리즈를 접어두고 번외 편으로 돌아왔습니다.


희곡의 대사 한 조각, 장면 하나를 붙잡고 들여다보는 「희극의 파편」 시리즈를 연재하며

저는 오래된 감정의 표면을 꾹꾹 눌러보고, 웃기면서도 아픈 무언가를 건져 올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파편을 감정적으로 응시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패턴의 방식은 어느 순간 정해진 틀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을 갖추는 건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스스로 갇히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중간중간 번외편을 연재하여 그런 불상사를 예방하고자 합니다.


‘희극’이라는 단어는 꼭 희곡이 아니라도 우리 삶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이 번외편은, 그 흩어진 희극을 줍는 작은 산책입니다.
가볍고, 조금은 무계획적이며, 말보다 여운이 많은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웃을 준비는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ㅎㅎ 그냥 바라보면 됩니다.


ASMR 만들어보기 <감각의 원본>을 중심으로


요즘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고 있는데요. 약사가 말하기를, 먹으면 잠이 와요...

그런데 이상하게 책을 집으면 직빵인데,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할 때는 약이 도통 듣질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영상을 틀어놓고 잠을 청해보는데요.

속삭임, 조용한 소리, 반복적인 움직임 등을 통해 듣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는 콘텐츠예요. 많이들 아시겠지만 감각을 자극하는 방식에 집중하는 영상들이라 보시면 됩니다.


1. ASMR이 끌리는 이유?


실제로 잠들기 전에 ASMR을 들으시는 분이 있나요? 저는 배민에서 메뉴 고르듯이 정말 신중하게 하나를 고르고 고릅니다. 이후 마치 명상하듯 경건한 자세로 듣고 평가하고 느끼고, 별로인 것 같으면 또 다른 영상을 찾아 헤맵니다. (고르기엔 영상이 정말 많습니다.유튜브계가 이미 레드오션이지만 ASMR도 정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레드오션의 세계인 것 같습니다..)


저는

Squishy (특수 제작된 부드러운 폴리우레탄 폼으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장난감의 한 종류)와




다꾸(다이어리 꾸미기의 준말, 가위로 자르고 문지르고 스티커를 붙이는 소리 위주),



Spit painting(침을 이용한 그림, 혀의 마찰음과 입소리),

실제로 이렇진 않습니다



Tapping(말 그대로 물건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효과가 가장 좋더라고요.


제가 애용하는 영상입니다.

1. 스퀴시 (https://youtu.be/Jd1l7kNfFDw?si=4Dp6FRfoQAmtjfti) Good Sound ASMR 채널

2. 다꾸 (https://youtu.be/JMqZA_ux-yk?si=6IX1WaGNDHYWd6Af) 지읒asmr 채널

3. 스핏페인팅 (https://youtu.be/tmLCqGGu8jc?si=XUQGYaGYzdwpCeh-) 브릴Vril ASMR 채널

4. 태핑 (https://youtu.be/3x5PzivPJ3Q?si=FbBn0sbVh_HCai2i) RaffyTaphyASMR 채널



기본적으로 단순한 소리가 반복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반복되는 소리가 단순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감각을 환기하고, 주의와 몰입을 유도해야 합니다. 잠시 세속적인 소리들을 차단하고 온전히 그 소리에 집중합니다.



2. 왜 반복할까? 잘하는 유튜버들의 특징, 미니멀리즘을 중심으로


Repetition is not generality. It is the singularity of existence.
반복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특이성이다.

질 들뢰즈


반복은 뜻을 지우고 감각을 남깁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마치 목탁 두드리는 소리에 안정을 느끼듯 ASMR도 그런 것과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도널드 저드 작품이 그러한 예시입니다. <Untitled (Stack), 1967>


이 작품은 재현을 거부하고 추상을 거부한 결과였습니다. 재현은 사진이 다 해버리고, 추상 또한 작가의 개인적, 심리적 서사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기에 그것 또한 재현의 반복이 아니냐, 라는 지적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미니멀리즘 작가들이 등장했습니다. '작가의 감정, 주관, 이야기조차 전부 제거하겠습니다.'

굳이 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만큼 '원본이 없는 순수 원본성'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화, 즉 그 네모난 테두리 안에서 그림 그리는 것은.. 이제는 지겹고 뭘 그리든 그것은 무언가의 재현이기 때문에(선 하나만 그려도 그것은 비, 나뭇가지, 실 등을 떠올릴 수 있기에),

3차원으로 공간을 바꾸고, 또 그것이 다른 의미를 생산해내면 안되면서 건축도 되면 안되기 때문에, 단순한 구조물을 반복적으로 쌓아올렸습니다. (<Untitled (Stack), 1967>)


그래서 미니멀리즘은 순수 형태, 반복, 물리적 존재감 이런 키워드들이 따라옵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가 느끼기에 좋은 소리를 가지고 반응이 좋은 ASMR 유튜버들의 특징에 대해 분석해보았습니다.


1) 지루하게 반복적이다.


-단순한 것을 반복하는 것은 나름 능동적인 자세입니다. 미니멀리즘의 등장 배경이 그러하듯 그것은 의미 구성 체계를 잠시 거부하는 행위이며, 부차적인 말이나 설명 없이 그 소리 자체만을 집중하도록 합니다.


2) 반복적인 소리를 유지하면서도 조금조금씩 즉흥적으로 소리들을 바꿔나간다.


-도널드 저드가 stack을 쌓은 것처럼 반복적인 틀(소리)을 유지하는 것은 작가의 감정을 지우면서도 특유의 감각만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자세를 바꾸거나 물건의 태핑 위치를 바꿔나가면서 더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데요. 그것이 그 유튜버만의 개성이 되고 다른 사람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소리 구성이 됩니다. 시행착오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장애물을 극복해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것은 어디에도 들어보지 못할 독자적인 소리가 됩니다, 새로운 원본이 만들어집니다.


3) 자신의 하루를 온전히 그곳에 투자한다.


-논외일 수도 있습니다만, 대부분 asmr 유튜버들의 표정은 꽤 심각하고 무표정이고 차분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추구하는 일, 정해진 형식도 없고 계획도 없고 손가락 한 마디 움직임에 소리가 달라지는 그 예민한 소리 감각을 만들어내는 일은 쉬운 일도 그리 즐거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즐거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ASMR은 순수오락 컨텐츠처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오락성보단 작품성을 주목하는, 적어도 저에게는 그 유튜버들이 예술가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분야가 존재하고,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 전문직으로 삼고, 직장에 다니거나 사업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 중에서도 사람은 (플라톤에 따르면) 로고스(이성적 인간), 투모스(정치적 인간), 에피쥬미아(욕망적 인간) 느낌의 형식으로 다양한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택해 살아갑니다. MBTI만 봐도 그러한 다양성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굳이굳이 감각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공허하고 현실을 회피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어가면서도 그들은 묵묵히 자신의 방식으로 감각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온전한 삶을 완성해나갑니다.



3. 내가 만든 ASMR


저도 한번 만들어봤습니다.

좀 허접하네요. 이걸로 잠에 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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