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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부부였는데 저희가 부부였나요?

「희극의 파편」26. 외젠 이오네스코 - 대머리 여가수 中

by 재준

소방대장


제 처남한테 아버지 쪽으로 사촌이 있었는데, 그 사촌의 외삼촌의 장인의 친조부가 재혼한 원주민 처녀의 오빠가 여행 중에 만나 한눈에 반한 처녀한테서 낳은 아들이 결혼한 대담한 여자 약사의 삼촌인 무명 영국 해군 장교의 양부한테는 스페인어가 유창한 숙모가 있었는데, 그 숙모는 젊어서 죽은 어떤 기술자의 손녀였고, 그 기술자의 조부는 싸구려 포도주를 생산하는 포도원 주인이었지만, 그 조부의 사촌 손자는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특무상사였고, 그 상사의 아들이 결혼한 젊고 예쁜 여자의 전남편의 부친은 성실한 애국자로서 재산을 불릴 셈으로 딸 중 하나를 잘 길러 로칠드를 잘 아는 어떤 사냥꾼한테 시집보냈는데, 그 사냥꾼의 형이 여러번 직업을 바꾼 후에 결혼하여 얻은 딸의 증조부는 몸이 약해서 사촌이 준 안경을 꼈었고, 그 사촌의 매부는 포르투칼 사람인데, 그럭저럭 살 만한 어떤 제분업자의 사생아였고, 그 제분업자의 젖동생은 어떤 전직 시골 의사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는데, 그 의사 역시 어떤 우유 장사 아들의 젖동생이었고, 그 우유 장사 역시 또 다른 시골 의사의 사생아로서 연달아 세 번을 결혼했는데, 세 번째 부인은...



마틴


그 셋째 부인 저 알아요. 착각인지 모르지만. 덫에 걸린 닭 잡아먹은 여자죠?



소방대장


그 여자 아녜요.



스미스 부인


쉿!



소방대장


에, 또... 그 셋째 부인은 그 지방 최고의 산파의 딸이었는데, 일찍 과부가 된 그 산파가... 그 산파가 재혼한 어떤 원기 왕성한 유리장이가 어떤 역장 딸하고 사이에서 얻은 아이는 자기 인생의 길을 찾아갈 줄 알아서... 어떤 야채장수하고 결혼했는데, 어떤 소도시 시장이었던 그 여자의 숙부가 결혼한 금발 여교사의 사촌은 낚시질 어부로... 메리라는 또 다른 금발 여교사를 부인으로 맞았고, 그 여자 오빠 역시 금발 여교사인 또 다른 메리하고 결혼했는데... 캐나다에서 그 여자의 부친을 키워준 어떤 할머니의 숙부는 목사였는데, 그 목사의 조모께서는, 겨울이면, 다들 그렇듯이, 때때로, 감기에 걸렸답니다.





sticker sticker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스물여섯 번째 작품은 외젠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입니다.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1909–1994)는 루마니아 출신 극작가로, 부조리극의 선구자 중 한 사람입니다. 거의 40대에 이르러서 극작가로 데뷔했고, 그의 희곡은 비논리적이고 무의미하고 과장된 대화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사실 부조리극은 아무렇게나 막 써도 될 것 같지만, 오세곤 평론가는 날선 하나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관객이 무슨 상황인지는 인지해야 한다. 내러티브에 관한 소통은 가능해야 한다.


즉, 아무리 막 써도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용 없는 무의미함을 남용하지 말고, 언어 해체의 방식을 알기 위해선 해체하기 이전의 언어 구조에 대해 잘 알아야하고, 그러면서 감각적이고 희극적인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즉흥적이고 충동적인데 리듬이 있어야 하는...



간단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스미스 부부가 등장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이후 손님으로 온 마틴 부부가 서로를 처음 보는 것처럼 이야기하다가 뒤늦게 자신들이 부부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후 갑자기 소방관이 등장해 아무 의미없는 이야기를 해대다가 마지막에는...


이런 식으로 끝이 납니다.



제가 선별한 장면은 이오네스크의 또 다른 작품 '수업'에서 교수가 학생을 이상하게 가르치는 장면입니다. 저도 부조리하게 가보겠습니다.


마틴


저, 실례입니다만, 아무래도 전에 어디서 뵌 거 같은데요.



마틴 부인


글쎄, 저도 어디선가 뵌 거 같네요.



마틴


혹시 맨체스터에서 우연히 뵙지 않았나요?



마틴 부인


그럴 수 있죠. 제가 맨체스터 출신이니까. 하지만 거기서 뵀는지 안 뵀는지 말씀 못 드리겠어요. 기억이 안 나네요.



마틴


거 참, 신기하네요. 저도 맨체스터 출신이에요.



마틴 부인


정말 신기하네요.



마틴


정말 신기해요... 하지만 전 오 주일쯤 전에 맨체스터를 떠났어요.



마틴 부인


정말 신기하네요. 어떻게 이럴 수가. 저도 오 주일쯤 전에 맨체스터를 떠났거든요.



마틴


전 아침 여덟시 반 기차를 타고 런던에서 다섯시 십오분 전에 도착했는데요.



마틴 부인


정말 신기하네요. 정말 희한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저도 그 기차를 탔어요.



마틴


거참, 정말 신기하네요. 그럼 아마 기차 안에서 뵌 거겠죠?



마틴 부인


그럴 수 있죠. 가능해요. 그럼요. 아니란 법이 있나요?... 그런데 전혀 생각이 안 나요.



마틴


전 이등칸을 탔는데요. 영국엔 이등 계급 같은 게 없지만, 전 여행은 늘 이동칸으로 하거든요.



마틴 부인


정말 희한하네요. 신기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저도 이등칸을 탔어요.



마틴


정말 신기하네요. 그럼 아마 이등칸에서 만났나 봐요.



마틴 부인


그럴 수 있죠. 분명히 가능해요. 하지만 생각이 잘 안 나네요.



마틴


전 팔호자 육호실이었는데요.



마틴 부인


정말 신기하네요. 저도 팔호자 육호실이었어요.



마틴


정말 신기하네요. 어떻게 이럴 수가. 그럼 아마 육호실에서 뵌 거겠죠?



마틴 부인


정말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생각이 안 나요.



마틴


솔직히 저도 생각이 안 나지만, 거기서 만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 잘 생각해 보면, 그 가능성이 대단히 높죠.



마틴 부인


네, 그래요. 암, 그렇고말고요.



마틴


정말 신기해요... 전 창가 쪽 삼번이었는데요.



마틴 부인


어머, 정말 신기하네요. 희한하고요. 전 창가쪽 육번이었어요. 바로 맞은 편 자리요.



마틴


거참. 정말 신기하네요.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럼 우리가 마주보고 있었던 거룬요. 거기서 본 거예요.



마틴 부인


정말 신기하네요. 분명 가능해요. 그런데 생각이 안 나요.



마틴


솔직히 저도 생각이 안 납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만났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죠.



마틴 부인


그래요. 하지만 확신을 못하겠어요.



마틴


저도 그래요. (생략) 전 딸이 있어요. 아주 어린. 두 살이죠. 금발에. 한 눈을 하얗고 한 눈은 빨개요. 이름은 엘리스고요. 정말 예뻐요.



마틴 부인


정말 어떻게 이럴 수가. 저도 아주 어린 딸이 있는데, 두 살이고. 한 눈은 하얗고 한 눈은 빨개요. 또 정말 예쁘고, 이름이 엘리스고요.



마틴


(여전히 단조롭게 늘어서는 목소리로) 참 신기하네요. 어떻게 이럴 수가. 희한해요. 아무래도 같은 애 같아요.



마틴 부인


정말 신기하네요.



꽤 오랜 침묵. 시계는 스물아홉 번을 친다.



마틴


(오래 생각한 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일어나 마틴 부인 쪽으로 향한다. 마틴 부인도 마틴의 엄숙ㅎ나 태도에 놀라 천천히 일어난다. 마틴은 여전히 느리고 단조롭고 또한 다소 노래처럼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럼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만난 적이 있고, 당신은 바로 제 아내입니다.. 엘리자베스, 다시 만났구려...



마틴 부인


도널드, 바로 당신이었군요.



(긴 생략)



하녀


지금 두 분은 너무 행복해서 제 얘길 못 듣습니다. 그래 비밀을 하나 가르쳐드리죠. 엘리자베슨 엘리자베스가 아니고, 도널든 도널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도널드가 말한 애는 엘리자베스의 딸이 아니거든요. 다른 앱니다. 물론 도널드의 딸은 엘리자베스의 딸처럼 한 눈은 하얗고 한 눈은 빨갛죠. 하지만 도널드 아이는 오른쪽이 하얗고 왼쪽이 빨간데, 엘리자베스 아이는 오른쪽이 빨갛고 왼쪽이 하얗거든요. 결국 도널드의 논증 체계는 이 마지막 장애에 부딪혀 무너지고, 모든 이론이 무산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결정적 증거로 보이는 그 기막힌 일치에도 불구하고 도널드와 엘리자베스는 같은 아이의 부모가 아니고, 따라서 두 사람은 도널드와 엘리자베스가 아닙니다. 자신이 도널드라 믿고, 자신이 엘리자베스라 믿어도 소용없습니다. 또 상대방을 엘리자베스라 믿어도 소용없습니다. 또 상대방을 엘리자베스라 믿고, 상대방을 도널드라 믿어도 소용없습니다. 둘 다 완전 착각을 한 거죠. 그럼 누가 정말 도널드고, 누가 정말 엘리자베스일까요? 도대체 이런 혼란의 지속이 누구한테 유리할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알려고 하지 말죠. 뭐든 있는 대로 그냥 놔두자고요. (문 쪽으로 몇 발자국 가다가 돌아와서 관객에게 말한다.) 제 본명이 셜록 홈즈거든요.


퇴장.



어떤가요?


혼란을 준 것 같아 죄송합니다. 사실 위의 장면은 '대머리 여가수' 작품 속 마틴과 마틴 부인이 서로가 부부임을 확인하는 장면입니다. 말이 안되는 것 같으면서도 어? 괜찮다, 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나요?ㅎㅎ


이오네스코는 실제로 영어 공부를 위해 영어 책을 읽다가 거기서 단순한 문장들을 보게 됐다고 합니다.

흔히 '일주일은 칠 일이고 일, 월, 화, 수, 목, 금, 토의 순서로 되어 있다.' '천장은 위에 있고 바닥은 밑에 있다.' '마틴이 마틴 부인의 남편이면 마틴 부인은 마틴의 남편이다.' 와 같은 당연한 진리들을 보며, 동시에 그렇게 적나라한 진실이 생경한 느낌마저 들면서 이런 작품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말을 더듬은 적이 있나요? 그걸 그대로 받아적으면 그것은 작품이 될 수 있나요? 작품이 되지 못한다면 말을 더듬은 사실은 거짓인가요?


2. 부조리극 속 인물들은 뭐가 그렇게 궁금하고 서로를 못 괴롭혀서 안달일까요?


3. 작품 이해가 완벽히 된다면 그것은 재밌는 일인가요?


4. 아무 이유없는 행동이 있나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라이킷 구독을 눌러본 적이 있나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아서, 아서, 꽃이 떨어지면 외로워. 그냥, 이 길을 지나가.



-박강수, 노래 '꽃이 바람에게 전하는 말' 中



오늘의 속담입니다.




새벽에 갔더니 초저녁에 온 사람 있더라

부지런히 하느라고 애썼는데 그보다 앞선 사람이 있을 경우



의미의 도착이 창작의 순간보다 빠를 때, 그것은 과연 누구의 하늘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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