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집무실.
의사(40세)
(책상 위 전보를 들여다본다.) 뭐야 이건? 장모님 이름으로 온 전보 아냐? 아내에게 전하고자 한 거로군. 근데 몬테카를로에서? (편지를 읽으려고 노력한다.) 한마디도 못 알아먹겠군. 보아하니 이건 영어로 쓴 것이로군. 서명이..., 서명이 '미셸' (생각에 잠긴다.) 미셸이 도대체 누구야? 왜 몬테카를로에서 왔지? 왜 장모님 이름으로? (방을 따라 거닐며 기억하려 애쓴다.) 미셸... 미셸... (이마를 치며) 기억났다! (다른 방으로 뛰어나갔다 앨범을 손에 쥐고는 곧장 되돌아온다. '아니야, 아니야.' 라고 하며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긴다. 그러다 갑자기 멈추며) 이 사람이야, 미셸... 그래, 성이 좀 특이하지. 리스... 그래, 맞았어, 미하일 이바노비치 리스. (앨범에서 사진을 꺼내어 뒤집은 후 뒷면을 읽는다.) '현재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아.' (다시 전보를 쥔다.) '몬테카를로에서.' 아내가 왜 니스로 가려는지 알겠군. 그녀의 미셸이 몬테카를로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야! (앨범을 책장에 던져 넣는다.) 영노사전이 어디에 있지! (사전을 꺼낸 다음 책상에 빈 종이를 놓고 번역하기 시작한다.) 드링... 달링... 마신다... 건강을... 나의... 소중한... 랍브... 라브... 사랑하는... 천 번을... 가냘픈 다리에 키스한다... 참을 수 없이... 기다린다... 도착을...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기계적으로 전보를 구기며 중얼거린다.) 가냘픈 다리! 가냘픈 다리! (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며) 맙소사, 좋은 시절은 다 가고 지옥에 있는 것 같군! 히스테리와 비난과 거짓, 조야한 위선 말고는 남은 게 없군. (기침을 하며 헐떡인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안락의자와의 등받이에 기댄다.) 건강하지도 않고,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녀에게 이야기해야겠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라고... 이혼해주고, 죄는 나 혼자 받아야 겠군...
(초인종이 울린다.)
그녀군, 그녀와 의논해봐야겠어.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스물일곱 번째 작품은 안톤 체홉의 '아내'입니다.
벌써 27번째 작품이나 되네요. 게시글은 30개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저조차도 제 게시글이 지루할 때도 있는데, 읽어주시고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수요일에는 체홉 작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체홉작품 모음 1 , 2 , 3 , 4 , 5 >
간단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의사인 남편이 아내에게 온 전보를 확인하게 됩니다. 내용을 보고 놀란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을 선언하기로 합니다. 아내의 반응은 어떨까요?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아내(27세)
(힘겹게 숨을 쉬며) 혐오스럽고 뚱뚱한 놈 같으니라고! (발을 구르며) 난 할 수 없어, 할 수 없어, 할 수 없다고!
의사(40세)
(그녀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오?
아내
(어린 소녀처럼 매우 심각한 모습으로 울먹이며) 금방 대학생인 아자르베코프가 나를 바래다주었는데, 그런데 그만 가방을 잃어버렸지 뭐예요. 거기에 15루블(약 100만 원 안팎의 가치)이 들어 있었는데, 엄마에게 빌린 거라고요.
의사
어쩔 수 없지! (한숨 쉬며) 잃어버린 건 잃어버린 거고, 뭐 신과 함께 하겠지. 진정하고, 당신과 할 말이 있어.
아내
(울음을 멈추지 않고 코를 푼다.) 돈을 등한시 할 만큼 난 백만장자가 아니라고요. 그는 자기가 갚겠다고 하짐나 난 안 믿어요. 그는 가난하다고요...
의사
(흥분하여) 아, 내가 25루블을 줄게. 제발 그냥 조용하라고! 다시 말하는데, 당신과 할 말이 있어!
아내
(변덕스럽게) 이런 모피코트 차리림으로는 심각한 얘기를 나눌 수 없다고요! 정말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네! (나간다.)
아내가 돌아온다. 그녀는 레이스가 달린 상의를 입고 있다. 그러고는 안락의자에 앉아 화장을 한다.
아내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요.
의사
(그녀에게 전보를 보이며) 본의 아니게 이 전보를 보았어...
아내
(전보를 받아서 읽은 후 어깨를 으쓱인다.) 그런데요? (안락의자를 흔든다.) 이건 통상적인 신년 축하 인사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기에 비밀은 없다고요.
의사
(흥분을 참으며 안락의자에 앉는다.) 당신 내가 영어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래,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사전은 있거든? 이건 리스로부터 온 전보지.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들며 당신에게 천 번이나 키스를 한다던걸. (서두르며) 그래, 그냥 넘어가자고, 넘어가... 난 정말 당신을 비난하기도 싫고 싸움도 원치 않아. 싸움도 비난도 이미 충분해. 이제 끝내자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당신은 자유로우니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고. (침묵. 그녀는 조용히 울기 시작한다.) 혐오와 거짓의 불가결함에서 당신을 해방시켜주겠어. 만약 이 젊은이를 사랑한다면 그래, 사랑하라고. 그에게 가길 원한다며 가. 당신은 젊고 건강한데, 난 이미 불구자야.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흥분하여 더듬으며) 한마디로 말해... 당신은 나를 이해할 거야.
아내
(울며) 난 아무것도 숨기는 게 없어요. 난 리스를 사랑해요, 그와 도시 외곽으로 드라이브 나가기도 했고요. 그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어요. 난 정말 외국으로 가고 싶어요. (숨을 들이켜며) 그래요, 다시 당신에게 간청할게요. 제발 너그럽게, 패스포트(당시 러시아 내부 여권)를 돌려주세요!
의사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자유의 몸이야.
아내
(남편에게 가까이 앉으며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조용히) 내가 언제쯤 패스포트를 받을 수 있죠?
의사
(결코 받지 못해, 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열정 없는 목소리로) 받고 싶을 때.
아내
딱 한 달만 갔다 올 거예요.
의사
당신, 영원히 리스에게 가도 돼. 이혼해주고 죄는 내가 받을게. 그 몫은 내가 치르면 되는 거야. 리스는 당신과 결혼할 수 있을 거야.
아내
(생기 있게) 아니, 난 정말로 이혼을 원치 않는다고요. (놀란 얼굴을 하며) 난 당신에게 이혼을 바란 게 아니에요! 패스포트만 주세요, 이게 전부예요.
의사
(흥분하기 시작하여) 아니, 당신 왜 이혼하지 않으려는 거야? 참 이상한 여자군. 만약 당신이 정말 그에게 매혹되었고 그도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네들 입장에선 결혼 말고 더 좋은 건 없잖아.
아내
(남편에게 떨어져 악의와 복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난 정말 당신을 잘 알아요. 내게 싫증이 나서 단지 내게서 도망치고 싶어 이혼하려는 거죠. 고마워요, 하지만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바보는 아니에요.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난 안 나가요, 안 나가요, 안 나간다고요! (남편이 자신의 말을 가로막을까 두려워하며 재빨리) 첫째, 난 사회적 위치를 잃기가 싫어요. 둘째, 난 벌써 스물일곱 살인데 리스는 스물세 살이에요. 1년 뒤면 그가 내게 싫증을 느껴 나를 버리겠죠. 그리고 세 번째, 알고 싶으시다면, 내 애정이 오래 지속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그건 당신을 향한 마음 때문이에요! 당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요.
의사
(소리치며 발을 구른다.) 내가 당신을 집에서 쫓아낼 거야! 꺼지라고, 저속하고 추악한 여편네야!
아내
(냉정하게) 또 보자고요! (거만하게 고개를 들고 방에서 나간다.)
의사
(주먹을 쥔 채 혐오스러움에 얼굴을 찌푸리고, 구석구석을 오가며) 맙소사, 나란 놈은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시골 사제의 아들 같으니라고. 단순하고 조야한 인간 같으니라고, 이 보잘것없고 뇌물이나 받아먹는 저급한 창조물에게 마치 노예처럼 수치스럽게 복종하고 만 건가?
(하녀가 들어와 문가에 서 있다.)
무슨 일이오?
하녀
마님이 좀전에 나리께서 약속하신 25루블을 달라고 하십니다.
의사는 머리를 움켜쥔다.
막.
어떤가요? 웃프지 않나요?ㅎㅎ 이 철저하고도 계산됐지만 인간적이고 애틋한 사랑은...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남편과 아내 중 누구 말이 더 맞다고 생각하나요?
2. '안 나가요, 안 나가요, 안 나간다고요!' 이 말은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요? 듣기 싫게 말해야 할까요, 꽤 앙증맞게 해야 할까요?
3. 남편은 자기에게 솔직한 인물일까요? 자기혐오를 하면서도 그는 자기애를 가지며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아가기 원하는 걸까요?
4. 남편은 무기력한 건가요, 적극적인 건가요?
5. 아내는 수동적인 인물인가요, 적극적인 인물인가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도자기 가마 속의) 불이라는 것에 대한 부탁, 신이라 그럴까 무언가를 바라는 그런 게 있는 거거든요. 잘 도와줄 때도 있는가 하면은 불이 다른 생각으로 비틀어 놓을 수도 있고, 그런 것과의 대화라 그럴까, 어떻게 비는 마음이라 그럴까...
-이우환
오늘의 음악입니다.
(출처: T : 채널)
남편은 언제나 망설이고, 아내는 불안히 떠나고, 나는 그냥 리듬에 맞춰, 무언가를 기다리며.. 읽기만 할 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