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나리
(그는 점심을 먹고 오침에 들었다가 방금 깨어나, 뭘 해야 할지 몰라하고 있다. 기지개를 켜며 하품한다.) 지루해! (시계를 본다.) 극장에 가긴 이른 시간이고, 썰매 타기도 귀찮군. (방을 따라 거닌다.) 뭘 한담? 뭘 하며 기분 전환을 하지? 바둑이나 둘까? 참... (바둑판을 가져와 바둑을 들여다본다.) 오른손과 왼손이 파트너가 되어야겠군. (오른손으로 둔다.) 자네는 이렇게 갔으니... 음, 음. 잠깐, 친구... (왼손으로 둔다.) 아 나는 이렇게! 좋았어... 자, 보자고. (오른손으로 말을 이동하며) 그렇게 두셨으니... 이렇게... (왼손으로) 그렇다면, 나는 여기에! 이해해, 이해해... 자네는 이렇게, 나는 요렇게! (왼손으로 둔 후, 잠시 살펴보다 오른손으로 둔다.) 뒤엉켰군! (말들을 정리하려고 애쓰며) 이기거나, 이기지 못하거나 결론은 마찬가지군. 제길, 지독하게도 재미없네! (모든 말들을 한꺼번에 뒤섞어버린다.)
예고르(하인)가 들어온다.
예고르
어떤 아가씨가 찾아왔습니다! 나리를 찾습니다!
친절한 나리
(놀라며) 아가씨가? 음... 대체 누구지? 별 상관없지만, 그래도 실례를 한 번... (실내복을 벗는다.)
예고르는 그에게 프록코트를 건넨 후 바둑판을 치우고 나간다. 친절한 나리는 빗을 꺼내 머리를 빗는다. 금발의 젊고 훌륭한 아가씨가 들어온다.
팔체바
(인사를 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죄송합니다... 저, 아시겠어요... 저는 나리를 ... 나리를 여섯 시나 되어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저는... 저는... 팔체바 마리야 예피모브나라고 해요, 7등 문관의 딸이죠...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열일곱 번째 작품은 안톤 체홉의 '숫양과 아가씨'입니다.
어쩌다보니 수요일에는 체홉 작품 위주로 선정하게 되네요. 수요일은 제게는 가장 나른한 날이기도 합니다.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고, 체홉의 단편은 저에게는 가장 편안하고 친숙하면서도, 단번에 좋은 느낌을 들게 하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ㅎㅎ 가장 나른한 날에 가장 좋아하는 작가 작품을 읽는 일은 꽤 즐거운 일입니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간단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친절한 나리 앞에 의문의 아가씨가 등장합니다. 아가씨는 친절한 나리에게 당장 고향으로 돌아갈 무료 승차권을 부탁하기 위해서인데요. 얘기를 들어보니 아가씨는 성실한 공무원 남자친구도 있고 가정교사라는 직업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할까요? 또 왜 무료승차권이 필요할까요? 또 친절한 나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촌극 수준의 분량입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팔체바
(난처해하며 앉는다.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만지며) 제가 온 건... 제가 온 건... 나리께 고향으로 돌아갈 무료승차권을 부탁하려고요. 제가 듣기로는, 나리가 주실 수 있다고 해서요... 저는 가고 싶은데, 기차표가... 부자가 아니라서... 저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쿠르스크까지 가야 해요...
친절한 나리
(호기심에 차) 음... 그렇다면... 근데 뭣 땜에 쿠르스크까지 가시는 거죠? 이곳이 뭔가 마음에 안 들기라도?
팔체바
아니요, 이곳은 좋아요. 하지만, 아실는지... 부모님이 그곳에 계세요. 저는 부모님께 가야 해요. 오랫동안 가지 못했거든요. 편지에 엄마가 편찮으시다고...
친절한 나리
(친절하게) 음... 여기서 일하세요, 아니면 공부하세요?
팔체바
(상냥하게) 저는... 가정교사 자격증이 있어요. 점심 전에는 사립 기숙사에서 25루블을 받고 일해요. 점심 먹고는 저녁때까지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수업을 하죠...
친절한 나리
예... 일을 하시는군요... 그래요, 당신의 봉급이 많다고 하면 안되겠군요... 그렇게 말해선 안 되죠... 당신에게 무료승차권을 주지 않으면 비인간적이겠군요... 음... 부모님께 가신다, 말하자면. (돌발적으로 활기를 띠며) 그런데 아마 쿠르스크가 아니라 아무르치크까지 가는 표밖에 없을 걸요? 음? 아무라슈카? 헤헤헤... 약혼자는요? (팔체바는 당황하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얼굴이 빨개지셨군요? 뭐 그러세요! 시집가시면 되죠. 그럴 때가 되었어요... 남자는 어떤 사람이에요?
팔체바
(조용히) 공무원이에요...
친절한 나리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잘되었군요. 쿠르스크로 가세요... 다들 말하길, 쿠르스크는 백 베르스타 떨어진 곳에서부터 벌써 국물 냄새가 나고 바퀴벌레가 이곳저곳 기어 다닌다니던데... 헤헤헤... 아마 쿠르스크에서는 지겹겠죠? 아, 모자 벗으시죠. (일어선다.)
팔체바가 어색한 움직임으로 모자를 벗는다.
친절한 나리
예, 그렇다마다요. 사양하지 마세요! (모자를 받아 선반에 놓는다. 소리치며) 예고르, 차 좀 가져와! 아마도 지루할 거예요. 그... 음... 그 쿠르스크에선.
팔체바
아니에요, 왜 그러세요! (밝아진 표정으로) 그곳에서도 공연을 하고, 콘서트가 있고, 춤과 벌금놀이와 저녁 정찬이 있다고요... 우리 오빠는 관리고, 아저씨는 선생님이에요...
친절한 나리
(차를 후루룩 마시며) 당신 약혼자는 잘해주는가요?
팔체바
남자에게 중요한 건 아름다움이 아니라 지혜랍니다. 그이는 벌써 서른인데 관등도 높지 않고 돈도 없어요. 하지만 그 대신 매우 똑똑하죠... 모두가 그를 존경해요... 왜냐고요? 왜냐하면 그이는 처신을 잘하고, 방탕하지도 않고, 또 나쁜 이들과는 상종도 않기 때문이죠...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면... 어떻게든 살 수 있겠죠.
친절한 나리
(가볍게 웃으며) 매우 기쁘군요. 나도 전적으로 당신 약혼자 편입니다.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어떻게 그와 만나셨소?
팔체바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인다.
친절한 나리
(미소 지으며)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이야기해주세요!
팔체바
그가 제게 와서는... 우리는 정원에서 볼링을 쳤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줬어요. 우린 둘 다 기쁨에 넘쳐 있었어요... 그 뒤에 그는 극장에서 청혼했죠. 아래쪽 옷걸이 옆에서. (자랑스럽게) 여기 페테르부르크로 온 이후에도 많은 청혼을 받았지요, 제가 모두 거절했지만...
친절한 나리
(치켜세우며) 대단해요, 대단해요!
팔체바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여기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 (편지를 건넨다.)
친절한 나리
(무관심하게 편지를 읽으며) 나쁘지 않은 필체를 가지셨군요. 당신 아버지는... 멋을 부린 글씨체로군요! 헤헤... (편지를 돌려주며 시계를 본다.) 그런데, 저는 이만... 공연이 벌써 시작되어서... 안녕히 가세요, 마리야 예피모브나!
팔체바
(고개를 들며) 제가 희망을 가져도 될까요?
친절한 나리
(놀라며) 예?
팔체바
나리께서 무료승차권을 주신다고 해서...
친절한 나리
(화내며) 승차권이요? 음... 내겐 표가 없습니다! 아마도 실수를 하신 것 같군요, 아가씨... 헤, 헤, 헤.. 잘못 오셨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 옆집에 역무원이 살죠. 나는 은행에서 근무한답니다! 안녕히 가세요, 마리야 예피모브나! 매우 반가웠습니다... 정말 반가웠습니다... (소리친다.) 예고르! (예고르가 들어온다.) 마차를 준비하고 우리 이웃 역무원이 어디에 사는지 아가씨에게 가르쳐드려! (나간다.)
팔체바는 모자를 들고 망연자실한 채 예고르를 쳐다본다.
예고르
우리 앞집에 살던 나리는 지금 없습니다요. 그분은 방금 모스크바로 떠나신걸요.
팔체바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울기 시작한다.
막.
어떤가요?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친절한 나리'처럼 이성을 단순한 호기심으로만 대해 본 적이 있나요?
2. '팔체바'는 순수한 사람일까요, 순진한 사람일까요?
3. 작가는 '친절한 나리'같은 인물을 풍자하는 목적이 강했을까요, 아니면 '팔체바'같은 인물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까요?
4. 마지막에 울어버리는 '팔체바'의 모습은 비참할까요? 혹은 꽤 희극적일까요?
5. 울고 있는 인물이 슬픔을 호소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자기 연민이나 과장처럼 느껴져 관객이 웃는다면, 그 웃음은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일까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나는 왜 사람들이 웃는지 알게 되었다. 그건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아픔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로버트 A. 하인라인-
오늘의 음악입니다.
빌 위더스의 'The Same Love That Made Me Laugh'
Withers in 1976
당신의 사랑은 금덩어리 같아요
Your love is like a a chunk of gold
얻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죠.
Hard to gain, and hard to hold
만지면 부드러운 장미처럼
Like a rose that's soft to touch
사랑은 떠나갔고 너무 아파요
Love has gone, and it hurts so much
글쎄, 그리고 왜
Well and why
나를 웃게 만들었던 그 사랑이 아닐까
Must the same love that made me laugh
WELL AND WHY를 길게 끌 때, 그 망설임과 함께 느껴지는 좋은 느낌이란, 나를 웃게 했던 그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