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문제로 따돌림을 당했던 둘째와는 다른 곳에서 그 쓴 맛을 보았던 큰 아이 이야기를 해볼까. 한국의 교과과정과 교육 트렌드를 충실히 따라가던 첫째의 학업 수준은 캐나다의 아이들과 겨루기에 차고 넘쳤어. 처음에 아이들은 천재가 나타났다며 큰 아이를 치켜세웠지. 수학 시간, 과학 시간, 심지어 영어 시간에도. 현지 아이들도 모르는 어려운 단어들을 알고 있으니 얼마나 신기했겠어.
우린 그 칭찬이 진짜가 아니란 걸 첫 학년이 끝나갈 즈음에야 알게 되었어.
큰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고등학교에 입학했어. 모두가 가장 선하고 매력적인 모습을 어필할 때였지. 그래서 우리 아이가 캐나다 땅을 밟은 지 얼마 안 된 FOB인 걸 다른 아이들은 몰랐어. 캐나다 고등학교는 반의 개념이 없이, 학기 시작 전에 짠 시간표대로 첫날부터 각 교실을 찾아다니는 식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전학생'이라 소개할 기회가 없었거든. 우리 아이에게 다가왔던 친절함은 그런 거였어. 모두가 간을 보면서 자기 무리를 만들어갈 때 사용하는 가식. 코로나 이전이었던 그 당시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인종차별을 죄악시했어. 부끄러운 인격 미달로 여기던 때. 그래서였을까. 백인 아이들은 정말 천사 같은 얼굴로 우리 아이에게 먼저 다가왔어. 자기 이름을 한국어로 써달라, 사물의 한국 명칭을 알려달라, 매일 한 문장씩 한국어를 가르쳐달라... 하굣길에 만난 내게 우리 아이와 어깨동무를 하며 "아줌마, 케첩 맛있어요!"라는 말도 안 되는 한국어를 외쳤지. 자랑인지, 조롱인지 모를 표정으로.
몇 번의 퀴즈와 시험을 보고, 서로 성적이 파악된 후, 아이들의 태도는 정말 무섭게 달라졌어. 모두가 학업에 관심이 높았던 이 학교의 아이들은 이 나라에 이제 막 온 아이가, 뭔가 도와주며 우월감을 느끼게 해 주던 동양 아이가 작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참을 수 없었던 걸까. 아이는 혼자 교실을 이동하기 시작했고, 함께 점심을 먹는 둥근 테이블에서 아이들은 우리 아이를 기준으로 좌우로 등을 돌렸어. 말을 걸어도 들어주지 않고, 대답해주지 않고. 무엇이 잘못인지 몰랐던 큰 아이는 매일매일 힘들어했지. 학교가 끝나면 약속을 한 듯 내 아이가 보는 앞에서 모두 함께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고서 자기들끼리만 쇼핑을 가고 친구네 집에 몰려 가더라. 멀리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온 얼굴을 구기며 울었어. 자기도 함께 놀고 싶다고. 아이들이 자기와 말을 섞지 않는다고.
페이스북 단톡이었을 거야. 어느 날 아이가 용기를 내서, 자기가 뭐 잘못한 것이 있는지, 왜 나를 멀리 하는지 물었어.
"이쯤 되면 알아서 나가야지. 모른 척 말고 그만 나가."
아이는 인사도 못하고 조용히 그 단톡방을 나왔어. '다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한다'는 게 따돌림의 이유였다는 건 몇 년 후 우연히 알게 되었지.
그 후로도 참 힘든 날들이 이어졌어. 한꺼번에 여러 명에게 거부당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더라. 어쩜 저렇게 생겼을까 싶게 예쁘고 반짝이던 그 아이들, 따로 만나게 될 때마다 보드랍게 안아주며 인사하던 그 아이들이 모여 한 마디씩 하던, 혹은 침묵하던 그 단톡방의 대화는 우리 아이를 두고두고 아주 오랫동안 괴롭혔어. 지나치게 눈치를 보고, 웃으며 나눈 말도 수십 번씩 곱씹으며 의심하고, 사람을 믿는 걸 무서워했지. 가장 분한 건 '누군가를 괴롭히고 뭉개도 잘 산다'는 사례를 직접 경험한 거였어.
이런 일은 한국에서도 얼마든 겪을 수 있지. 그런데 외국에서 겪으니 그 충격의 색이 달라지더라. 인종 차별로 받아들였어. 백인이 리더가 되는 건 아무도 반기를 들거나 불평하지 않았으니까. 학년이 높아질수록 인종이 섞인 친구 그룹은 쉽게 보기 어려웠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어. 아시안끼리, 브라운끼리, 백인끼리... 그렇게 나뉘더라고.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한인 학생회, 아시안 연합, 인도인 단체, 블랙 캐네디언 커뮤니티... 내겐 두꺼운 유리 천장 아래 놓여있는 소수들의 보험 같았어.
학부모 대상 이벤트에 가면, 학부모들도 같은 인종들끼리 모여 앉아있었어. 따로 알고 인사하며 지내던 백인 엄마들도 내가 앉은 테이블엔 오지 않더라.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 공개 범위도 모르는 채로 무의미한 스몰톡이나 나눠야 하는 뉴페이스보다는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도 무슨 의미인지 척척 알아듣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은 게 정상이잖아. 나 같아도 잘 모르는 나라에서 온 엄마에게 먼저 다가가 나와 아이에 대해 처음부터 늘어놓으며 살갑게 대하지 않을 텐데. 누구도 던져주지 않은 열등감에 젖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았던 나를 반성해. 다가오지 않으면 내가 먼저 비집고 들어가면 되는 건데, 그렇게 내가 먼저 나서서 아이의 방패가 되어주었어야 했던 건데, 나는 나의 소심함을 핑계 삼아 내 아이에게 '침묵하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또 다른 돌덩이가 되었던 거였어. 백인들 가득한 테이블에 앉을 용기도, 내가 있어도 중국어로만 소통하는 테이블에 앉을 용기도 참 쉽게 나지 않더라. 거기서 알았지. 한국인이 없거나 너무 적은 학교는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는 걸.
그런 반성 이후로, 난 학교에 참 열심히 갔어.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주지 않으면, 오히려 높은 선생님 근처로 가서 무슨 말이든 하며 웃었어. 아이들 발표회에 가도 가급적 늦게까지 서서 누군가와라도 눈을 맞추고 인사를 했지. 우리 아이도 있다, 나도 있다, 동양 엄마도 이런 설명회에 온다는 걸 보여주려고. 아이를 데리러 가서도 차에 앉아 기다리지 않고 일부러 밖에 나가서 서성거렸어. 우리의 옷을 적셔줄 가랑비가 조금 더 자주, 조금 더 굵게 내리기를 바랐어.
단톡방에 함께 있던 아이들과는 졸업할 때까지 다시는 가까워지지 않았어. 그런데도 학교 이벤트 사진들이나 졸업 앨범에 남아있는 사진들 속에서는 둘도 없이 다정한 사이들처럼 껴안고 뺨을 대고 윗니가 다 드러나도록 활짝 웃고 있어. 서양 문화는 그런 거구나... 배웠지. 우리 아이들 표현을 빌리자면, '백인들은 의리가 없어'. 세상 무엇보다 달콤하고 폭신한 말로 위로하고 스스럼없이 안아주며 친절한 얼굴을 보여주지만, 그건 정말 '말'일뿐이었어. '언제든 연락해. 네 등 뒤엔 항상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마!'는 그냥 '밥 한 번 먹자'의 캐나다버전이더라.
내 이야기는 철저히 우리가 겪은 우리 가족의 이야기야. 객관화시켜선 안 되는. 그 시절에 내가 모르는 우리 아이들의 문제점이 분명히 있었을 수 있고, 세상에 둘도 없이 의리 있는 백인 친구들과 끈끈한 정을 나누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을 거야.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서로 속내를 터놓는 백인 친구들이 있고. 그런데도 내가 우리 아이들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놓으며 이 민감한 이야기를 하는 건, 그저 '문화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더라, 아무리 애써도 이해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다름이 있더라, 매순간 '나'를 증명하는 건 아이에게 버거운 일이더라, 나의 가치관이 정립되기 전인 어린 시절에 유학을 가면 그 흔들리는 각도가 더 크더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야. 그리고 캐나다에도 두터운 유리 천장이 분명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