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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시와 Jan 13. 2020

제주의 다락방에서 빨간머리앤을 만나다

제주 송당리 여행 - 만남

제주공항의 출국장을 나서는 몸과 마음은 가뿐했다. 2박 3일 동안 단출한 여행을 지향했기에 찾을 짐도 없었다. 공항에서 바로 숙소로 향하는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렇다. 뚜벅이 여행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자연을 풍광 삼아 글 작업을 마무리할 요량이었기에 렌터카 따위는 필요 없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런 마음이었다. 가는 길은 멀미 기운이 돌 정도로 제법 구불구불했지만, 이마저도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이윽고 작은 정류장에서 내렸다. 생소한 이름, 송당리였다. 제주 북동쪽 구좌읍에 위치한 낯선 마을. 아직 체크인 시각이 제법 남았기에 먼저 짐을 맡길 요량으로 지도 앱을 살폈다. 숙소까지는 도보로 5분 남짓이면 충분했다. 2차선 좁은 도로를 따라 쭉 걸었다.


돌담과 덩굴이 뒤엉킨 매력적인 외양 때문에 들어가게 된 카페


제주도 향토색이 배어 나오는 매력적인 카페와 음식점, 아기자기한 숍들이 심심치 않을 정도로 서있었다. 나처럼 오가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가까운 관광지도 없는데 좀 의외다 싶었다. 후에 알게 됐지만 송당리에는, 국내의 대표적 맛집 방송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다방(!)이 있었다. 해당 카페는 외관상 작아 보였지만 문전성시를 이뤘다. 서울이든 제주이든 전파를 타면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드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인가 보다. 덕분인지 송당리의 다른 가게들도 적당히 관광객들의 발길이 머무는 듯했다.


2층은 주인댁 부부의 보금자리이고, 1층은 북카페, 3층은 게스트하우스로 운영 중이다.


내가 머물 북카페 겸 게스트하우스는 도로에서 살짝 들어가 마을 초입에 있었다. 불과 몇십 걸음만 들어가도, 관광객들의 흔적은 없었다. 대신 멋스럽게 지어진 하얀 집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소유보다 존재’, 깨어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지향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여니 따뜻하고 아늑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진에서 보아온 이미지 그대로였다. 구매 가능한 책들이 비치된 작은 서가와 마음껏 책을 볼 수 있는 북카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주인분은 마침 카페에 계셔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때를 훌쩍 넘긴 시각임에도 아직 식사를 못해 많이 출출했던 터. 주인분께 짐을 맡기고 동네의 맛집 추천을 부탁드렸다. 이미 동네의 식도락 지도가 준비되어 있었다. 세심하고 친절한 안내를 받고 다시 동네를 거닐었다. 고기국수로 주린 배를 채운 후, 얼추 시각이 맞아 체크인을 했다.

천정이 높은 계단을 오르다 보면 민트색 다락방에 이른다. 실제 공간은 훨씬 넓다. 책상, 전신 거울, 냉장고 등이 있고,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테라스도 갖췄다.


집을 지어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니면 다락방이 딸린 복층 아파트도 좋다. 서울살이에서 무척 사치스러운 소망이지만, 언젠가를 되뇌며 아직 버리지 못한 꿈. 서울에서 제주로 이주한 주인 부부가 손수 지었다는 이 집에 머물며 그 꿈이 잠시 고개를 든다.


천정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방을 한층 밝혀준다. 모니터에서 눈을 돌리면 고즈넉한 녹음이 맞아주는 창가


2박 3일 동안 거처할, 천정이 낮은 민트색 다락방을 이윽고 대면했다. 송당리에서의 첫날, 나머지 시간은 이곳에서 머무는 걸로 충분하다고 결정했다.


폭신한 민트색 요 이불에 누워, 최근 시즌이 업데이트된 넷플릭스의 <빨간 머리 앤>을 보았다. 애번리 초록지붕 집에서 꿈을 키운 앤보다 어느새 머리가 희끗희끗한 마닐라에 (쪼금 더) 가까운 나이가 되어버렸지만, 오늘은 그냥 앤에 감정이입을 하기로 한다. 글 작업을 위해 애써 짊어지고 온 노트북도 커서만 깜빡이게 생겼지만 탓하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제주 송당리에서 첫날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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