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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사랑을 내어주세요

아버지의 사랑이 적힌 손 편지를 받아 든 날

by 감격발전소

아빠는 늘 배우고 익히는 걸 참 좋아하는 분이셨다. 아빠의 책상에는 늘 만년필로 꾹꾹 눌러쓰신 노트가 펼쳐져 있었고, 나는 늘 노트에 빼곡히 적힌 아빠의 손글씨를 보고 자랐다. 한데, 내가 결혼과 동시에 독립하여 다른 가정을 이루자 아빠의 손글씨를 더 이상 접할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꽤나 다정한 분이셨고, 따스한 스킨십도 아끼지 않으셨음에도 이상하게도 ‘사랑한다’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셨던 분이었다. 돌아가신 엄마 또한 가족에 대한 헌신이 대단하셨던 분이었는데 엄마 또한 ‘사랑한다'는 표현에는 인색하셨다.


한 번은 직장동료와 카풀을 하며 출퇴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전화 말미에 그가 상대방에게 "사랑합니다"라 외치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정지 상태.


너 금방 어머니랑 통화한다 안 했어?

나의 놀란 얼굴에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응, 엄마랑 통화했지. 그런데 우리 가족은 늘 이렇게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아.. 그렇구나...."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오갔다.


‘유년기의 자녀가 아닌 장성한 자녀와 부모도 저렇게 사랑의 말을 주고받을 수 있구나’,

‘내 딸 최고다, 내가 네 덕에 산다가’ 아닌

곧바로 직진하고야 마는 ‘사랑한다’는 말을

저렇게 일상어로 주고받을 수가 있구나...............


이후 나 또한 동료의 대화를 떠올리며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수백 번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늘 실패하고 말았다. 무려 몇 년간이나.


이후 '이번엔 정말 하고 말 거야'라는 굳은 결의 아래 두 주먹 불끈 쥐고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었으나 곁에 있던 자매들의 비웃음을 샀고, 이후 내 입에선 좀처럼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아이를 낳았고 손주의 생일잔치에 아버지를 초대했다. 아버지는 손주에게 생일 축하금이 든 봉투를 건네셨는데 봉투 겉면엔 놀랍게도 “OO아 사랑한다, 생일 축하한다 – 할아버지가 ”라는 말이 커다랗게 적혀있었다.


헙! 뭐지?! 우리 아빠가 사랑한다는 말도 할 줄 아는 분이네
와, 완전 놀랍다!!!
그런데 왜.....
나한텐 안 해주지?”

놀라움에 이어 묘한 질투심, 원망스러움이 차례대로 따라왔다.


‘질투를 하더니.. 그것도 아들에게..’

이런 상황에서 질투가 삐져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애매한 이 복잡 미묘한 감정에 나는 어쩔 줄 몰랐고 결국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의 손글씨가 괜스레 그리워진 하루가 있었다.

‘우리 아빠 글씨 참 이뻤는데..

만년필로 사각사각 적어 내려 가던 아빠 특유의 필체. 왠지 그립다..’


그러던 차에 아빠의 생일이 돌아왔고, 아빠의 생일잔치를 우리 집에서 하게 되었다. 식사를 거하게 마친 후 나는 어디서 용기가 샘솟았는지 아빠에게 다짜고짜 종이와 펜을 내민 후 말했다.


“아빠, 나도 사랑한다고 적어줘”

어리둥절해하는 아빠의 얼굴과 뭘 어떻게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 앞에서, 나는 다소 벌게진 얼굴로 내가 듣고 싶은 말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지선아 사랑해’

‘지선아 넌 소중해’

‘지선아 넌 탁월해’

‘지선아 넌 특별해’

‘지선아 넌 하고도 남아’

‘지선아 넌 백점’


이렇게 적어줘.. 아빠....


아빠는 나의 얼굴을 설핏 응시하더니, 딸이 다짜고짜 쏟아내는 사랑의 말들을 한치의 주저 없이 종이에 스윽스윽 써 내려가셨다.


그립던 아빠의 손글씨로 종이 한 장 가득 사랑의 말들이 적혔고 그 종이를 받아 든 나는 이내 먹먹해졌다.

요청하면 되는구나.
기다리고 원망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요청하고, 말하고, 부탁하면 되는구나…’


이 단순한 진리를 아빠의 품을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풀어냈다.


사랑은 그저 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내게 당신의 사랑을 내어달라’고, ‘나는 당신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다’고 요청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날이면 아비의 사랑이 잔뜩 적힌 쪽지를 열어보려 한다. 그가 적어 내려 간 사랑의 말들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이내 씩씩함을 회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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