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은 아이가 했는데, 배운 건 엄마였다
엄마도 전학생이라 내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딸아이가 입을 쭉 내밀고 말했다.
전교생 11명인 시골 마을 분교에서, 천 명이 넘는 학교로 전학 간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학급대표 선거에 나가겠다고 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를 바라보다가,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큰 학교로 전학 와서 적응하느라 정신없을 텐데 학급 대표에 나간다니, 너무 장해서 말문을 잃은 거야.
와, 정말 대단하다. 우리 집 같은 소심이 집안에서 너 같은 애가 나오다니.
와, 엄마는 정말 놀랍다.”
남편과 아들에게도 딸아이의 학급 대표 출마 소식을 전하니, 남편 역시 나처럼 놀란 반응을 보였다. 오빠인 아들은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말했다.
“야, 학급 대표가 좋은 건 줄 알지?
완전 잡이야, 잡.
잡부란 뜻이지.
귀찮은 건 다 도맡아 해야 하는데 그걸 도대체 왜 나간다는 거야?”
오빠의 핀잔에도 딸아이는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개선됐으면 하는 점이 자기 눈에 보이고, 학급 대표를 발판 삼아 그것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는 주말 내내 선생님이 나눠준 학급 대표 선거 입후보 신청서를 붙잡고 앉아 있었다. 출마하게 된 계기와, 학급을 위한 공약을 적는 칸이 있었다.
작은 학교에서 나름 단단하게 자라서일까. 아이는 그 어느 것보다 반이 함께 일구어 갔으면 하는 ‘가치’부터 단단히 세우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한 달 남짓 학교생활을 하며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소통이 잘되는 반, 고마워할 줄 아는 따뜻한 반, 질서를 지키는 반, 깨끗하고 쾌적한 반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출마 신청서를 써 내려갔다.
한번 봐 달라는 아이의 요청에 나는,
핵심 가치를 내세운 부분은 너무 좋지만 그 가치를 실현할 방안이 구체적이지 않다며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소통이 자유로운 반을 위해 학생의 소리함을 만든다는 건 좋아.
그런데 질서, 쾌적함, 고마움 같은 가치를 어떤 방법으로 실천할 건지가 나와야 돼.
어쩌고 저쩌고…”
점점 엄마가 아니라 직장인으로서의 자아가 고개를 들며 아이를 코칭하고 있는데, 순간 입후보 신청서가 허공에 붕 떠올랐다.
엄마의 잔소리에 마음이 상한 딸아이가 “나 안 해!”를 외치며 공약이 적힌 종이를 날려 버린 것이다.
아뿔싸.
작작하자, 이 엄마야.
딸아이 앞에서 나는 순간 겸손해졌다.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린 딸아이가, 자기가 모의 발표를 해 볼 테니 한번 봐 달라고 했다.
아이는 공약이 적힌 종이에 눈을 박은 채 글을 줄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에 나는 또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렇게 글만 읽어서는 안 된다고.
너를 바라보고 있는 친구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말해야 한다고.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연설이 왜 감동적인 줄 아느냐고, 그는 쉼표와 호흡을 잘 활용하기 때문이라고.
자기 주장을 펼칠 때 잠시 쉼을 줌으로써 연설의 집중도를 높이고, 이어질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고, 말하는 사람의 감정까지 대중이 느낄 수 있도록 호흡을 조절한다고.
맙소사.
공약이 적힌 종이가 또 한 번 허공에 휘날렸다. 마음 상한 딸아이는 또다시 공약서를 날려 버리고, 삐친 얼굴로 방을 나갔다.
애미야, 애미야.
너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사이 학급 대표 선출일이 다가왔다. 선출일 전날, 딸아이는 한 번 더 내 앞에서 모의 연설을 했다. 전적이 있는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음… 모든 문장을 같은 톤으로 읽는 것도 좋긴 한데,
중요한 단어에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말해 보면 어떨까?
그리고 동작을 살짝 넣어서 시선을 끄는 것도 좋은 방법 같은데?”
아이는 내가 제안한 동작 중 두어 가지만 골라 연습했고, 너무 떨린다는 말을 남긴 채 등교했다. 나 역시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엄마한테 전화하라고 일러 두고 출근했는데, 학교가 마치는 오후 세 시가 다 되도록 전화가 없었다.
아이구… 혹시… 하고 우려하고 있는데 딸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나 떨어졌어…”
“……”
“아이고, 그랬구나. 많이 속상했지? 우리 딸… 울었어?”
“응…
총 두 명 뽑았는데 난 3등 했어. 2표 차이로.
2표만 더 받았으면 내가 될 수 있었는데…”
울먹이는 딸에게 도전한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저녁에 치킨 먹으면서 기분 풀자고 했더니 금세 화색을 띠며 그러겠다고 했다.
드디어 퇴근 후 저녁.
이럴 땐 분위기 빌드업에 나보다 아들이 제격이다. 아들을 대동하고 치킨집으로 나섰다.
닭다리를 우걱우걱 뜯으며 아들이 말했다.
“난 네가 학급 대표 될 줄 알았는데.”
말이 없는 딸.
“근데 1등 한 애는 공약을 뭘로 걸었냐?”
“생일 챙겨주기 하겠다고 하더라.
말도 엄청 사교적으로 잘했고.”
“오~ 생일 챙겨주기라. 진짜 혹하는 공약이다.”
“학급 대표는 1년에 한 번씩 뽑는 거야?”
“아니, 한 학기에 한 번.”
“그럼 2학기 때 또 나갈 수 있는 거네?
그럼 너 마니또 공약 해라. 우리 반 반장도 마니또 공약 내걸어서 압도적으로 이겼어.”
“우와~ 마니또 좋다!!”
역시 엄마보다는 또래인 오빠가 낫다. 후후.
희망의 빛이 도는 얼굴로 딸아이가 말을 이었다. 1등 득표를 한 애가 자기에게 와서 자기를 뽑았다고 말했다고. 그래서 깜짝 놀랐고, 동시에 조금 의아했다고 했다. 자기는 총 3표를 받았는데, 전학 가서 새로 사귄 친구가 둘이 있단다.
자기가 받은 3표를 꼽아보면
1등 득표한 아이가 자기에게 준 1표,
자기가 자기를 찍은 1표,
그러면 1표가 남는다.
결국 새로 사귄 친구 둘 중 한 명은 자기를 안 뽑았다는 뜻 아니냐며 아이의 눈썹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2등으로 뽑힌 아이가 소감을 말하며 “전학 온 아이가 3표를 받았다는 것 자체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고 해 기분이 살짝 나빴다고도 했다.
나는 뭐 그런 애가 다 있냐며, 말을 해도 그렇게 정내미 떨어지게 하냐고 맞장구를 쳤다.
딸아이에게 필요한 건 세심한 코칭이 아니라, 따뜻한 엄마, 완전한 내 편, 흔들리지 않는 지지자라는 걸 앞서 허공에 날린 종이를 보며 이미 배웠기 때문이다.
치킨으로 배를 따뜻하게 채운 뒤, 왼손에는 딸아이 손을, 오른손에는 아들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아들이 입을 열었다.
“엄마, 나 과학 경시대회 나가볼까?”
“엉? 과학 경시대회? 너 그런 거 관심 없잖아.”
깜짝 놀라 묻자 아들이 말했다.
“아~ 나 그런 거 귀찮기도 하고 과학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거 나가기만 해도 점수를 준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가 볼까 싶어.”
허허헛. 역시나 아들다운 발상이다 싶었다. 이번에는 아들의 기를 꺾지 않고 말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도전하는 게 대단한 거야.
멋지다, 우리 아들.
멋지다, 우리 딸.
내가 너희 덕에 어깨 펴고, 가슴 펴고 다닌다.”
선거에서 아쉽게 떨어진 아이도,
점수를 준다는 말에 슬쩍 마음이 움직인 아이도,
저마다의 이유로 세상 앞에 한 걸음 내딛고 있었다.
그 사실이 대견하고 또 고마워 나는 두 손을 더 꼭 잡았다.
그날 밤, 우리 셋의 얼굴에는
밤하늘의 보름달처럼 환한 빛이 두둥실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