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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은 콩밭에 Jan 02. 2024

(독서)밝은 방_사진에 관한 노트

롤랑바르트

두 번째 책 저술 작업을 시작했다. 목차도 개요도 서문도 계약서도 아직은 없다. 그렇지만 열중하면 꽤 괜찮은 작업물이 나올 것이란 확신은 있으며, 든든하게 받쳐주는 재료들도 있다.     


지금은 참고 문헌과 배경지식이 될 만한 자료를 모으고 공부하고 있는 단계. 평론이 될지 에세이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꽤 실험적이고 야심찬 도전이 될 것 같다. 학부 때 기호학 수업을 들었던 것이 도움이 될 지도. 언어를 통해 환원할 수 없었던 어떤 정서의 정체, 그 지점에 또 다른 ‘언어’가 파고들어 수용자를 확장시켜주는 그 지점에 대해 파고들고 성찰하는 글쓰기를 하고자 한다. 다시 두 번째 산 만들기가 시작됐다. 이번 산은 지난 번 삼보다 결과물이 더 알록달록하지 않을지. 


20대 초중반 내내 했던 게 창작은 아니고 평론, 문학평론, 연극평론, 서평 뭐 이런 거 였는데 아직까지 그 글쓰기의 테두리에서 못 벗어난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십대 글쓰기의 세계를 뒤덮었던 자장이 이렇게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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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하나의 기호만큼 내포적이고 확실하며 고귀하기를 원할 것이며, 이로 인해 그것은 하나의 언어가 지닌 위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기호가 있기 위해서는 표시가 있어야 한다. 19쪽. 

=사진이 담보하는 다른 층위의 위엄이 분명히 있다.     

 

사진이 찍히는 사람 혹은 사물은 과녁이고, 지시대상이며, 일종의 작은 모사물이고 대상이 발산하는 환영적 이미지인데 이것을 사진의 유령(스펙트럼)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22쪽.    

  

정서는 내가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환원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이유로 인해 내가 사진을 환원시키고자 했던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욕망, 혐오, 향수, 행복감이 직접적으로 침투하는 어떤 정서적 지향성이나 목표가 대상으로부터 포착될 수 있을까. 36쪽.      


사진들에 대해 느끼는 것은 평균적인 정서, 길들이기, 라틴어로 말하면 스투디움인데 이것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연구를 의미하지 않고 어떤 것에 대한 전념, 애정, 열정적이지만 특별히 격렬하지 않은 일반적인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스투디움을 통해 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두 번재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고 부를 것이다. 푼크툼은 찔린자국이며 작은 구멍이며, 조그만 얼룩이고, 작게 베인 상처이며, 주사위 던지기이기 때문이다. 푼크툼은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는 그 우연이다. 42쪽 

    

사진은 회화의 유령에 의해 괴롭힘을 당해왔고, 아직 그런 상태에 있다. 사진은 원시 연극과 같으며, 활인화같고 부동의 분칠한 얼굴의 형상화 우리에게 사자들을 드러내는 그 형상화이다. 48쪽. 


 눈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순간의 동작을 포착하여 자주 재현한 놀라움이다. 예컨대 보나파르트가 방금 자파의 페스트환자들을 만졌다. 그가 손은 떼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진은 순간적인 작용을 이용하여 빠른 장면을 결정적인 순간 속에 부동화한다. 예컨대 아페스테기는 퓌블리시스 화재 때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여자를 사진에 담았다. 49쪽.  

    

스투디움이 나를 매혹시키거나 나에게 상처를 주는 어떤 세부요소(푼크툼)가 관통하지 않고 그것에 의해 자극받고 얼룩지지 않는 한, 우리가 단일한 사진이라 부를 수 있는 매우 널리 퍼져있는 사진유형을 낳는다는 점이다. 수동문, 부정문, 의문문, 강조문이 그런 변형들이다. 59쪽.      


스투디움은 분명하다. 교양 있는 선량한 사람으로 사진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호의적으로 흥미를 느낀다. 왜냐하면 이 사진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면, 가족주의, 순응주의, 나들이 복장이고, 백인 모습으로 치장하기 위한 사회적 상승노력이다. 광경은 나의 흥미를 끌지만 나를 찌르지 못한다. 나를 찌르는 것은 누이의 넓은 허리띠이고, 초등학생처럼 열중쉬어 자세인 그녀의 두 팔이며, 특히 끈달린 그녀의 구두이다. 이러한 푼크툼은 내 안에서 커다란 온정, 동정 같은 것을 일으킨다.  

    

푼크툼이 아무리 전격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소간 잠재적으로 어떤 확장의 힘을 지니고 있다. 이 힘은 흔히 환유적이다. 한 소년이 길잡이 역할을 하는 눈먼 집시 아마추어 바이올니스트를 찍은 케르테스의 사진이 있다. 61쪽.      


지시 대상을 지각하고(사진은 진정으로 그것 자체를 넘어선다. 이것이 사진 예술에 대한 유일한 증거 아니겠는가? 사진은 매체로서 스스로를 폐기시키고 더 이상 기호가 아니고 사물 자체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지시 대상을 넘어선다.     


사진은 무언가의 표시를 통해서 더 이상 하찮은 것이 아니다. 무언가가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내안에서 작은 전복, 사토리, 어떤 공의 지나감을 야기시켰다. ‘분별 있는’ 사진들을 장악하고 잇는 덕성스러운 몸짓은 게으른 몸짓(책상을 뒤적이고 대강 무기력하게 쳐다보며, 늑장을 부리면서 서두르는 행위 따위)이다. 반대로 푼크툼의 읽기는 순간적이고 능동적이며, 야수처럼 웅크린다. “사진을 현상한다”는 말은 어휘상의 술책이다. 그러나 화학적 작용이 현상하는 것은 현상 불가능한 것이고, 상처가 잇는 본질이며, 변형될 수 없지만 다만 집요함의 형태로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68쪽.      


사진이 부동의 이미지로 정의될 때, 이것은 사진이 나타내는 인물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인물들이 튀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나비처럼 마치되어 꽂혀있다. 75쪽.      


바르트는 사진을 촬영자(사진작가) 구경꾼(사진을 바라보는 자), 유령(사진 직힌 대상이 발산하는 환영적 이미지)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156쪽.     

 

사진에 가려진 시야를 부여, 탈육화, 현상학, 탐구, 작은 환희, 상처로서 사진, 동요, 폭동의 동료와 존엄. 사진 작가의 투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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