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야, 이거 한 입 먹어봐 정말 맛있어. “
“지금 배불러서요 안 먹을래요”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고등학교 때 학교를 마치고 학원으로 가야 하는 시간까지 3시간이 둥 떠서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가기엔 너무 멀어서 버스 타고 왕복으로 오가면 3시간이 끝나버렸기에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소극적인 성격으로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해 친구와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다.
같이 학원을 다니던 친구 한 명이 있었는데 학원비 부담으로 한 달 만에 관둬버려서 혼자 다녔다.
근데 난 학원이 꼭 다니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자격증을 꼭 취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고등학교 근처에 외할머니가 사신다는 걸 생각해 냈다.
할머니는 장가를 못 간 노총각인 삼촌 둘과 함께 사셨는데 낮에는 삼촌들이 출근하셔서 할머니 혼자 계셨다. 하지만 나 혼자 할머니댁을 간 적은 없다.
가끔 가게 되더라도 엄마와 함께 갔었기에 할머니랑 끈끈한 할머니와 손녀사이는 아니었다.
“엄마, 나 학원 가기 전까지 시간 비는데 할머니댁에 가 있을까?”
“좋지. 우리 엄마가 정말 좋아할 거야”
엄마는 적극 좋아하셨지만 나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럼 할머니한테 전화로 얘기 좀 해놔 죠. 와우가 간다고”
“알았어”
나는 학교에서 끝나 할머니댁으로 향했다.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매번 아빠 차로 가던 길을 걸어서 혼자 가는 건 처음이라 어색했다.
할머니댁의 파란 대문을 들어서니 조용하다.
비교적 거리가 짧은 마당을 지나는데 인기척을 내도 안쪽 깊숙한 방에 계신 할머니는 아직 못 들으신 모양이다.
“할머니~”
우선 할머니를 불렀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면 바로 미닫이 문이 보인다. 할머니가 그 방에 계실 것이다.
항상 생신이나 명절에만 할머니댁에 온터라 북적북적 8형제들이 오가던 이곳이 오늘은 허전하고 평온하다.
나는 미닫이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아랫목에 두껍게 깔아져 있는 이불 위에 앉아 TV를 보고 계시다가 문이 열리자 그제야 고개를 돌려 누가 왔는지를 확인하셨다.
“어~? 복덩이구나!”
할머니는 내 동생 이름을 부르며 활짝 웃으셨다.
나의 형제는 언니와 나 그리고 여동생 복덩이. 그리고 남동생 귀남이 이렇게 넷이 있다.
그런데 할머니는 연세가 드셔서 나를 보시면 혹은 언니를 보면 무조건 복덩이를 부르신다. 내 밑 여동생이름 말이다.
엄마가 여동생 낳을 땐 집안 형편이 어려워 병원에 가서 아이를 낳지 않고 집에서 낳으셨다고 한다.
산통이 올 때쯤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할머니가 서둘러 오셨고 그래서 할머니가 복덩이 내 동생을 받으셨다.
그때의 할머니 마음을 엄마에게 전해 듣은 바로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동네 아기엄마들이 낳는 아기들을 열 번 넘게 받았지만 내 딸이 낳는 아이를 받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잘못될까 봐 정말 무서웠다’고 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복덩이 낳는 병원비를 아껴 살림에 보태셨다고.
그래서 복덩이는 태어날 때 몇 킬로인지 모른다. 근데 무척 컸다고. 그렇게만 기억한다.
“할머니, 저 와우예요”
“어? 복덩이가 아니고? “
“네, 저 와우예요.”
할머니는 멋쩍게 웃으시며 잘 왔다고 얼른 아랫목에 앉으라고 이불을 들쳐주셨다.
민망하고 어색한 이 시간이 힘들었다.
’ 지금 50살을 바라보는 나였다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할머니 손도 잡아주고 했을 텐데.‘
그때 17살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와우야, 텔레비전 좀 어떻게 해줘라.”
할머니가 말씀하셔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소리는 음소거 상태. 그런 데다가 화면조정으로 제대로 된 화면이 아니었다. 지지직 그 자체.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번호 선택할 줄을 몰라. 다른 거 켜려다 이렇게 되어버려서 아무것도 못 보고 있었어.”
아쿠 안타까워라. 내 마음은 정말 안타까웠지만 그것과 다르게 퉁명스럽게 할머니에게 묻고 있다.
”몇번 보고 싶으신데요? “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냥 뭐라도 나오게 해 주면 절대 안건들일게.”
얼마나 적적하셨는지 간절하셨다.
나는 KBS채널로 켜드리고 소리도 어느 정도 들리게 키워드렸다.
나에겐 별일 아닌데 할머니께서 정말 좋아하시면서 손뼉 치셨다. 그 뒤 다음날도 할머니는 KBS채널만 보고 계셨다.
나는 그렇게 3시간을 버티다 학원으로 갔다.
그리고 이틀 뒤 할머니댁으로 가는 날이 되었다. 월, 수, 금요일만 학원에 가기 때문에 할머니댁에 매일 가는 건 아니었다.
“와우 왔구나”
기다리셨다는 듯 이번엔 할머니가 내 이름을 정확히 부르시며 반가워하셨다.
나는 할머니가 앉으라는 아랫목을 못 본 척 조금 비켜 방 한가운데에 앉아 책가방을 열어 책을 꺼내려고 뒤적거렸다.
“밥 먹었니?”
“아뇨, 안 배고파요.”
무뚝뚝한 그때의 나를 후회한다. 할머니께서는 식사를 하셨는지 이런 걸 묻고 답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할머니는 부엌으로 가셔서 밥 위에 오이부추김치를 잔뜩 얹어 갖고 들어오셨다.
“와우야, 이거 한 입 먹어봐 정말 맛있어.”
“지금 배불러서요 안 먹을래요.”
투박스러운 그릇에 쟁반도 없이 들고 오신 밥을 할머니는 대충 비벼서 드신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나는 초라한 식사를 드시는 할머니를 쳐다만 봤다.
“오이가 아주 시큼하게 익어서 정말 맛있어”
“네, 드세요. 전 지금 배가 불러서요”
그날도 난 그렇게 살갑지 않은 손녀딸로 3시간 자리를 지키다가 학원으로 갔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엄마가 밥을 드시는 걸 봤다.
넓은 그릇에 밥을 넣고 오이김치를 수북이 담고는 비벼드신다.
“엄마, 왜 밥을 그렇게 먹어?”
“이게 왜?”
“할머니랑 똑같이 먹잖아”
“우리 엄마가 이렇게 먹어?”
“응, 막 비비시더니 시큼하게 익어서 너무 맛있으시대”
엄마는 깔깔 웃으며 할머니랑 똑같은 모습으로 드신다.
똑같다 아주 많이.
나는 그 뒤로도 월, 수, 금요일만 되면 할머니댁으로 갔다.
조금씩 편해진 나는 할머니댁에서 라면도 끓여 먹었다.
먹는 내 모습을 우두커니 앉아 보시면서 잘 먹는다고 웃으신던 모습이 생생하다.
가끔은 방 한가운데에 다리를 쭉 뻗고 누워 잤다.
내가 자는 내내 할머니는 아랫목 그 자리 그렇게 앉으셔서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때로는 자는 나를 보시기도 했다.
어떤 날은 내가 학원으로 가야 할 시간에 비가 내렸다.
우리 집은 형제도 많지만 잃어버리고 오는 우산도 많았다.
우산이 많은 게 아니고, 없어진 우산이 많았다는 거다.
그래서 나에겐 우산이 없는 날이 많았다.
“와우야 비 오는데 우산 있어?”
“우산 없어도 되어요. 금방 달려가려고요”
“무슨 소리야 비 맞으면 안 되지”
할머니는 할머니가 앉아 있는 바닥의 장판을 걷어 내시더니 거기에 꽁꽁 숨겨둔 지폐들 중에 5천 원을 주셨다.
“가다가 우산 사서 쓰고 가라 비 맞지 말고”
“감사합니다.”
나에게 태어나서 3단 우산이 처음 생긴 날이다.
그 돈을 받고 달려 나와 문방구로 가서 3단 우산을 샀기 때문이다.
집으로 달려와 엄마에게 자랑했다.
“엄마 할머니가 돈 주셔서 우산 샀어”
“우리 엄마도 돈 없었을 텐데 왜 주셨대~”
어려운 형편에 우산은 그렇게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지금 내가 우산을 학교에 두고 오는 아들 녀석에게 지독히 히스테리 부리는 것은 다 그 어려운 형편의 귀하던 우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첫 우산은 할머니가 사주신 거다.
어느 날 할머니를 드리려고 용돈을 꺼내 오렌지를 한 봉지 샀다.
이젠 학원에 친구들을 사귀어 할머니댁에 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정하게 ‘할머니 이거 사 왔어요. 까드릴까요.’
했어야 했다. 할머니가 시큼하게 익은 오이김치를 좋아하셨으니 오렌지도 잘 드시겠지 라는 생각으로 사 간 오렌지는 주방 한 구석에 몰래 두기만 했다.
더 생각이 깊었다면 우리 엄마말대로 떡을 사갔어야 했다. 오렌지 사두고 왔다고 엄마한테 말 하니
“우리 엄마 떡 좋아하는데.”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좀 더 철이 들었더라면
’ 할머니 이젠 월, 수, 금 못 와요. 학원 안 가거든요.‘
했어야 했다.
나는 오렌지만 두고 몰래 나왔다.
그 중요한 말도 못 하고 말이다.
“할머니가 너 삐졌냐고 전화 왔어”
“내가 왜 삐져?”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안 온다고”
“내가 가면 뭘 좋다고”
나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뒤로 이모며 삼촌이며 돌아가면 전화가 왔다고 한다.
“와우 삐졌어?”라며.
할머니가 이모건 삼촌이건 전화 걸어 와우가 와서 참 좋았다고 하셨다고 한다.
3개월 동안 정들으셨는지 모르고 난 나만의 생활에 바빴었다.
나는 그 뒤로 할머니댁에 간 적이 없다.
그리고 3년 뒤 할머니는 치매가 오셨다. 그래서 큰삼촌이 삼촌댁으로 모시고 갔다.
큰삼촌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도 가까웠기에 할머니댁과도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직장생활을 다니던 때라 큰 삼촌댁으로 할머니를 찾아뵈러 갔다.
달달한 빵을 여러 개 사들고 갔다.
“할머니. 저 왔어요.”
“와우 왔구나”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시고는 반가워하셨다.
나는 할머니 다리도 주물러 드리고 손도 마사지해 드렸다.
뼈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다리라 살살 주물렀더니 더 세게 주물러 달라고 하셨다.
내가 사가지고 간 빵도 뜯어 입에 조금씩 넣어드렸다.
그렇게 할머니는 6개월 뒤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머니는 좋은 곳으로 가셨는지 가끔 내 꿈에 나타나신다.
좋은 옷을 입으시고 많은 음식들이 놓인 테이블 앞에 앉으셔서 흐뭇하게 웃고 계시는 꿈.
나는 오이철만 되면 부추와 버무려 오이부추김치를 만든다.
넓은 그릇에 밥을 담고 오이김치를 수북이 담아 쓱쓱 비벼서 할머니와 엄마가 먹던 그 방식대로 나도 그렇게 먹는다.
할머니, 엄마, 나의 입맛은 똑 닮았다.
오이부추김치
1. 오이는 소금으로 살살 비벼 닦는다. (오이 6개)
2. 부추는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다. 부추는 짧게 짧게 칼로 자른다.
3. 오이는 3등분으로 자른 후 잘라진 오이를 2~3등분으로 또 잘라준다.
4. 양념 : 고춧가루 4스푼, 멸치액젓 4스푼, 설탕 2스푼, 생강가루 1 티스푼, 마늘 2스푼
5. 잘라진 오이와 부추를 양념을 섞어 통에 잘 담아 냉장고에 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