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에서

엄마가 들려주던 이야기3

by 와우wow


그때 그 시절엔, 어느 집이든 문만 두드리면 누구든 반겨주던 시절이였다.

이웃 간의 경계가 없었고, 정이 오갔던 시절이다.

우리 집은 언덕 위에 있었고, 언덕을 조금만 내려가면 경식이네가 있었다.


엄마는 어디를 가든 내 손을 꼭 잡고 다니셨다.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는 어린 나는 그저 매번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했다.

그날도 엄마는 경식이네에 간다며 나를 데리고 나섰다. 경식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시절엔 장례를 집에서 치렀다.

상주는 경식이 아버지였고 외아들이라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조문을 오고, 음식이 오가고, 집 안팎이 북적였지만 분위기는 무거웠다.

나는 엄마 옆에 얌전히 앉아 내어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집에서 분주히 일하던 경식이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참 곱고 예뻤다.

고된 와중에도 맑고 뽀얀 얼굴빛이 인상 깊었다.

그래서였을까. ‘경식이도 엄마를 닮아 그렇게 하얗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엄마와 경식이 할머니가 조용히 나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경식이 아버지가, 말이야… 바람이 났어. 바로 근처에 여자 하나랑 살고 있어. 우짤꼬 답답해 죽겠수다.”

경식이 할머니 말에 나는 어린 마음에도 충격이 컸다.

장례 중에도 경식이 아버지는 저녁만 되면 ‘퇴근’하듯 첩이 사는 집으로 갔다고 했다.

그 사이 며느리는 혼자서 밤새 손님을 맞이하며 상을 치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네요. 마음이 얼마나 안 좋아요. 경식이 할머니.”

“말도 마. 며느리 보기 미안해 죽겠수다…”

경식이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경식이는 막대기 하나 들고 마당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다시 언덕을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엄마와 둘째 고모네를 가던 길이었다.

나는 경식이 아버지가 어떤 여인과 함께 길을 걷는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사람이 바로,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그 첩이라는 걸.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들은 마치 어제 본 드라마처럼 생생하다.

그 이후에도 경식이 엄마는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지만, 묵묵히 그 자리에 남아 경식이를 키워냈다.


그녀는 왜 떠나지 않았을까.

갈 곳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그 자리가 ‘어머니’로서 자신의 마지막 지켜야 할 자존심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경식이 하나만은 흔들리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 자라게 하고 싶었던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이 나이가 되어서도 나는 종종 그 이유를, 그 마음을 상상해 본다.

그때는 어렴풋이 알지 못했던 어른들의 복잡한 마음과,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감정의 무게를 이제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경식이 엄마의 고운 얼굴, 말없이 일하던 손, 그리고 마당에 퍼지던 어울리지 않게 밝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모든 것이 시간 속에 묻힌 듯하지만, 문득문득 떠오른다.


세상은 참 많이 달라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절의 사람들은 내 안에서 좀처럼 낡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그 언덕길 어귀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손을 꼭 잡아주던 엄마 곁에서,

마당 끝에서 장난치는 경식이를 바라보며,

한없이 조용한 마음으로,

그날의 오후를 오래도록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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