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대형 감독의 영화 <윤희에게>
*2020년도 책무리 도서출판 텀블벅 프로젝트 <이불 아지트>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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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본가에 올라가지 않는 주말이었다. 주말도 평일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낼 수 없다며, 친한 동생에게 연락해 일요일 조조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 ‘윤희에게’, 영화사에서 일하는 언니가 추천한 영화였다. 우연히 추천받은 영화 중 영화의 오프닝부터 영화를 좋아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주 오랜만에 영화 <윤희에게> 오프닝 기차 소리와 기차 밖 겨울 바다 풍경을 보고 영화의 결말이 어떻든 영화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영화는 셋이서 봤다. 친한 동생, 나, 그리고 당신. 당신이 내게 보여준 겨울 삿포르와 오타루 사진, 들려준 홋카이도 여행 이야기는 언젠가 혼자서라도 가고 싶은 여행지에 올려놓았기 때문이고 영화 내용이 꼭 당신을 떠올리게 한 몫도 있기 때문이다. 몇 센티인지 가늠할 수 없는 눈에 파묻혀 찍힌 당신의 사진은 영화 속에서 “이 눈은 언제 그치려나” 대사와 닮았고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패딩을 입지 않은 당신이 패딩을 입고 찍은 사진은 영화 속 코트를 입고 귀가 새빨개진 쥰과 윤희, 패딩을 입어도 귀가 빨갛던 새봄을 보며 겨울 오타루의 위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당신은 존재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남으로 돌아갈 때 봄은 오고 있고 나는 한겨울이었다. 치워도 치워도 쌓이는 눈처럼, <윤희에게> 속 오타루처럼, 쥰의 편지처럼 당신이 계속 쌓여만 갔다. 당신과 나눈 대화, 봄이 오면 같이 가고 싶은 장소들, 당신과 보고 싶었던 영화와 같은 흩어져버린 추억들이, 당신과의 관계가 무너져 버린 건 내 잘못이 크다며 후회와 더 잘 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밤새 조용히 지붕 위 눈 쌓이듯 하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로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그러다 쥰의 편지 일부처럼 ‘당신 꿈을 꿀 때’, ‘더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 나도 당신에 대한 편지를 쓰곤 했다. 부치지 못한 편지, 그리고 당신에게 닿지 못한 편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보낼 수 있었다.
윤희와 쥰이 함께한 시간은 서로에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가장 충만한 시간이었다. 그들은 이별 이후 마음을 꼭꼭 숨기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스스로 벌을 주며 살아왔다. 윤희는 쥰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다닌 후, 오빠가 하자는 대로 그가 소개한 사람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윤희의 남편은 윤희를 “어딘가 사람을 외롭게 하는 사람”, 새봄은 “아빠보다 더 외로워 보여 혼자 잘 못 살 것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한편 쥰은 부모님의 이혼 후 아빠를 따라 일본으로 와 고모와 함께 산다. 쥰은 동성인 료코가 자신에게 호감 있는 것을 눈치챈다. 그런 료코에게 쥰은 자신의 비밀을 꺼내고 “혹시 료코씨도 여태까지 숨기고 살아온 게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숨기고 살아요.”라고 말하며 거리를 둔다. 이렇게 윤희와 쥰은 한겨울에 홀로 쓸쓸히 서 있기로 한 나목(裸木) 같다. 과연 그들에게 봄이 올 수 있을까. 쥰의 부치지 못한 편지는 쥰의 고모가 우체통에 넣어 한국에 도착한다. 새봄이 윤희보다 먼저 편지를 발견하고 새봄은 대학 입학 전 윤희와 함께 편지의 발신지로 여행을 떠난다.
20년간 가슴 속에 묻어두고 살아왔던 인생에 사랑했던 사람이 불쑥 소식을 전한다면, 어쩌면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정이 전제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나는 종종 당신과 재회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쥰의 꿈속처럼 우리는 ‘같이 있다.’ 마지막 통화에서 당신에게 겁쟁이라고 말한 것을 사과한다. 언제까지나 당신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으니까, 충분히 당신에게 향한 나의 마음에 대한 대답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정작 당신을 현실에서 맞닿을 때 나는 누군가 내 어깨를 쳐줄 때까지 얼어있을 것이다. 실망할까, 후회할까, 당신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했던 나를 사랑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당신을 다시 만나 좋았다고 말할까. 오래도록 쌓인 그리움은 실제 감정과 비례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도 분명한 것은 설렘과 기대감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윤희는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쥰의 집 앞에 내렸으나 인기척에 숨어버린다. 또한 악세사리 가게에서 윤희는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대본다. 바에서 윤희는 그 귀걸이를 하고 앉아있다. 새봄에게는 오타루에 사는 옛친구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했으면서 바텐더에겐 옛친구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윤희는 쥰을 그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쥰이 나타났을 때 윤희 자신이 어떤 상태에 놓일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웠다. 때론 묻어둬야 아름다울 때가 있으니까. 운하시티 앞에서 쥰과 윤희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본다. 쥰이 윤희에게 “윤희니?” 물어보기 전까지 윤희는 돌아보지 않을 때 약간의 긴장감이 흐른다. 쥰을 돌아볼 때 윤희는 눈물이 흐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재회의 기쁨뿐만 아니라 과거로부터 도망친 윤희 자신에게 원망과 자책을 그만해도 된다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이네”
윤희를 그리워하며 보낸 시간, 보고 싶었다는 말을 완곡하게 전할 수 있는 말. 이별 이후 어떤 삶을 살아왔던 것보다 재회한 그 순간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듯이 쥰은 윤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편지에서 “도망치고 있었다”라고 썼지만, 과거 서로의 관계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단지 그들의 사랑이 인정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불행한 일들을 초래할 때 그들은 이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오랜만이네” “그러네” 아주 짧은 대화는 20년 만에 동성을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들을 더이상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후련함과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맞닿은 것이다.
영화에서 윤희의 고모는 종종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라고 말한다. 평소의 쥰은 “눈 그치려면 멀었잖아.” 답했는데, 윤희와의 재회 후, 쥰이 고모보다 먼저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고 한다. 쥰의 그리움이 해소되고 앞으로 쥰은 정체성을 조금씩 드러낼 것임을, 그렇게 눈이 그치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 한편 서울로 대학에 가게 된 새봄은 윤희와 함께 서울로 이사 간다. 윤희는 이력서를 작성하고, 언젠가 자기만의 작은 식당을 꾸리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웃는다. 윤희는 쥰의 답장을 쓰며 영화는 끝난다.
새벽부터 내린 비는 극장을 나서도 그칠 줄 몰랐다. 당신과의 시간을 돌아보면 가장 먼저 비가 떠올라 그날도 당신을 생각했다. 나는 수없이 썼던 편지를 고쳐 적었다. 많은 물음과 나에 대한 벌을 그만두고 우리는 그 관계에 서로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이제야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당신 꿈을 꾼 날이면 종종 당신 마음을 헤아려 보듯 당신도 한 번쯤 나를 생각해주길. 그러다 언젠가 우리가 재회하게 된다면 “오랜만이네”라고 말을 건네며 살포시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