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맏딸은 살림밑천이라던데

우리 엄마는 금메달이었다

by 우연우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횡행하던 시대.

딸 하나, 아들 하나는 금메달, 딸 둘은 은메달, 아들 둘은 목매달이라는 유머가 있었다. 실은 딸 둘이 목매달인지, 아들 둘이 목매달인지 헷갈린다. 하여간 딸 하나, 아들 하나를 최고로 쳤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금메달이었다. 맏딸 하나와 아래로는 4살 차이 나는 아들을 두고 있었다. 완벽했다.


엄마는 그 사실이 약간은 자랑스러운 듯했다.

터울도 4살 터울이라는 데에 자랑스러워 보였다. 왜냐면, 중학교, 고등학교가 안 겹치니까.

두 살이나 세 살 터울이면 졸업식, 입학식이 겹치기도 하고 둘 다 같이 중학교나 고등학교 진학해서 한꺼번에 돈이 나가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돈 들을 일이 조금 줄어든다는 거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더러 말했다.

맏딸은 살림밑천이다. 네가 엄마 많이 도와드려라,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약간 이해할 수 있기 되었을 쯤엔 그 말이 싫었다.

내가 왜 살림 밑천이야?

태어나보니까 첫째가 되어 있었는데 나는 왜 동생을 책임져야 해?


나도 내게 언니나 오빠가 있었으면 했다. 동생 말고.

내게 4살 터울 남동생은 애증 그 자체의 존재다.


내가 9살 때쯤의 일이다.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셨고, 오전에 아동부 예배가 끝나면 11시에 대예배가 시작됐다.

대예배에 아이들은 들어갈 수 없어서 (시끄러우니까. 지금처럼 부모와 아이들이 한 곳에 앉아서 예배를 볼 수 있는 방 같은 건 따로 두지 않던 교회였다) 밖에서 놀았다.


그때마다 엄마는 내게 '동생 잘 돌봐라'라고 했다. 그러니까 손 붙잡고 다니면서 5살 난 천방지축 똥개 같은 동생을 아무거나 못 만지게 하고, 아무 데나 못 가게 하고 해야만 했다는 뜻이다. 한 시간여 동안 말이다.


그러던 어는 날이었다. 친구 중 누군가 내게 과자를 사 먹으러 가자고 했고, 나는 동생이 교회 앞 정원에서 노는 걸 보고 내버려 두고 친구랑 과자를 사러 슈퍼로 갔다.

솔직히 후련하고 기분 좋았다. 동생을 안 봐도 되는 게 너무 좋았단 말이다.

친구랑 과자를 사 먹고 근처를 쏘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예배가 마치고 부모님이 나를 찾으러 왔다. 근데 교회 앞 정원에서 놀던 동생이 사라진 거다.

엄마는 내게 다그쳤다.

"동생 똑바로 안 보고 뭐 했냐"라고 말이다.

그때 내가 혼나서 울었던가? 기억이 안 난다. 동생을 찾으러 사방팔방 뛰어다닌 것 같긴 하다.

그러다 찾았지만. 어디선가 제 친구랑 놀고 있었던 것 같다.

매번 축축한 동생 손을 붙잡고 어디론가 가지 못하게 혼내고 다그치고 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엄마는 내가 맏딸이라서 좋았겠지만

나는 내가 딸인 것이, 그리고 첫째인 것이 좋았던 적이 없다.

지금도 그렇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TK의 장녀, 태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