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금메달이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횡행하던 시대.
딸 하나, 아들 하나는 금메달, 딸 둘은 은메달, 아들 둘은 목매달이라는 유머가 있었다. 실은 딸 둘이 목매달인지, 아들 둘이 목매달인지 헷갈린다. 하여간 딸 하나, 아들 하나를 최고로 쳤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금메달이었다. 맏딸 하나와 아래로는 4살 차이 나는 아들을 두고 있었다. 완벽했다.
엄마는 그 사실이 약간은 자랑스러운 듯했다.
터울도 4살 터울이라는 데에 자랑스러워 보였다. 왜냐면, 중학교, 고등학교가 안 겹치니까.
두 살이나 세 살 터울이면 졸업식, 입학식이 겹치기도 하고 둘 다 같이 중학교나 고등학교 진학해서 한꺼번에 돈이 나가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돈 들을 일이 조금 줄어든다는 거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더러 말했다.
맏딸은 살림밑천이다. 네가 엄마 많이 도와드려라,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약간 이해할 수 있기 되었을 쯤엔 그 말이 싫었다.
내가 왜 살림 밑천이야?
태어나보니까 첫째가 되어 있었는데 나는 왜 동생을 책임져야 해?
나도 내게 언니나 오빠가 있었으면 했다. 동생 말고.
내게 4살 터울 남동생은 애증 그 자체의 존재다.
내가 9살 때쯤의 일이다.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셨고, 오전에 아동부 예배가 끝나면 11시에 대예배가 시작됐다.
대예배에 아이들은 들어갈 수 없어서 (시끄러우니까. 지금처럼 부모와 아이들이 한 곳에 앉아서 예배를 볼 수 있는 방 같은 건 따로 두지 않던 교회였다) 밖에서 놀았다.
그때마다 엄마는 내게 '동생 잘 돌봐라'라고 했다. 그러니까 손 붙잡고 다니면서 5살 난 천방지축 똥개 같은 동생을 아무거나 못 만지게 하고, 아무 데나 못 가게 하고 해야만 했다는 뜻이다. 한 시간여 동안 말이다.
그러던 어는 날이었다. 친구 중 누군가 내게 과자를 사 먹으러 가자고 했고, 나는 동생이 교회 앞 정원에서 노는 걸 보고 내버려 두고 친구랑 과자를 사러 슈퍼로 갔다.
솔직히 후련하고 기분 좋았다. 동생을 안 봐도 되는 게 너무 좋았단 말이다.
친구랑 과자를 사 먹고 근처를 쏘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예배가 마치고 부모님이 나를 찾으러 왔다. 근데 교회 앞 정원에서 놀던 동생이 사라진 거다.
엄마는 내게 다그쳤다.
"동생 똑바로 안 보고 뭐 했냐"라고 말이다.
그때 내가 혼나서 울었던가? 기억이 안 난다. 동생을 찾으러 사방팔방 뛰어다닌 것 같긴 하다.
그러다 찾았지만. 어디선가 제 친구랑 놀고 있었던 것 같다.
매번 축축한 동생 손을 붙잡고 어디론가 가지 못하게 혼내고 다그치고 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엄마는 내가 맏딸이라서 좋았겠지만
나는 내가 딸인 것이, 그리고 첫째인 것이 좋았던 적이 없다.
지금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