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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K의 장녀, 태어나다

어쩌다 보니 제가 TK의 장녀가 되어있었습니다.

by 우연우

이것은 한 인간의 일대기다.



나는 서울 올림픽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어느 맑은 날에 태어났다. 실은 그날 날씨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므로, 일단 맑은 날이라고 적어본다.


내 모친은 초산으로 40주를 거의 꽉 채운 상태였다.

그리고 갑자기 심상치 않음을 느껴, 시외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산부인과에 갔다.

의사 왈 "아직 아기 나오려면 한참 남았어요. 집에 가세요."

집으로 돌아오자 더욱 이상함을 느낀 모친.

다시 또 병원으로 향한다. 같은 날 두 번 병원을 방문한 것이다.

그러자 의사가 하는 말 "애가 나올 것 같네요. 입원하세요."라고 했단다.


대략 초산은 아기가 나오기까지 엄청나게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게 중론이다.

내 모친은 그날 오후에 입원하여 다음날 오후에 나를 낳았다. 엄청난 진통이었다.


오후 6시경, 고령의 한 산부인과에서 나는 태어났다.

그 시절에는 산후조리원이라는 개념이 따로 없었다. 엄마의 출산을 돕기 위해 할머니, 즉 엄마의 시모가 집에 와 계신 상황이었다. 내 모친은 3-4일간의 입원을 끝낸 후, 강보에 나를 싼 채로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긴 시간의 진통과 제대로 되지 않은 후처치로 인하여 엄마는 회음부가 무척 아픈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할머니가 와서 "아한테 분유 같은 거 미기지 말고 젖물리라. 니는 일도 안하이까 젖이라도 물리야 될꺼 아이가?" 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모친은 회음부 통증을 참기 위해 억지로 다리를 꼬고 앉아 나에게 안 나오는 젖을 물렸다.

(그 시절로 인해 모친은 골반이 틀어져 아직도 골반 통증을 달고 산다.)

나는 나대로 제대로 먹지 못해서 하루 종일 예민하게 울어댔고, 엄마는 엄마대로 나오지 않는 젖과 회음부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던 나날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무럭무럭 자라나서 외동딸로서의 모든 것을 독차지했다.

부모의 사랑과 예쁜 옷, 장난감 그리고 비싸고 맛있는 간식, 음식들.

그 시절에 부친이 돈을 꽤 잘 벌었다.

나는 간식으로 언제나 자그마한 유리병에 든 수입산 퓌레를 먹었다고 했다.

당시 가격으로도 한 통에 8천 원씩 하던 걸, 나는 하루에 3-4개씩 먹었다고 했다.

그러니 얼마나 나를 사랑으로 애지중지 키우셨을까?

짐작도 가지 않는다.


나는 커서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고, 꽃집 아가씨가 되고 싶었다.

(꽃집에 아가씨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하는 CF CM 송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발레리나 흉내를 내면 부친은 "아이고, 우리 딸내미 잘한다!", "잘한다!" 하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이나 다를 바 없는 엄청난 일이 생긴다.

남동생이 태어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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