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너별 Nov 06. 2020

나의 온도는 일정하다

차가웠던, 뜨거웠던 그 때를 떠올리며


인간은 정온 동물이다. 섭씨 36.5도, 그 오차 범위에서 1도 정도만 벗어나도 이상이 있다는 의미이다.












#1 35도




그날은 모든 결심을 마친 상태였다. 힌트를 주는 것이 예의라고 판단한 나는 그날 모든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명동을 나섰다. 만나니 팔짱을 끼고 오늘은 부대찌개집에 가 보자고 하더라. 알았다고 했다. 그날의 나는 평소와 많이 달랐다.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많이 없었다. 걸어가면서 나누는 대화는 일방적이었다.


식당에 도착하여 어김없이 느껴지는 그녀의 백치미. 버터인지 마가린인지 모르겠는 그 물질을 끓이기 전에 냄비에 미리 넣는 거라는 그녀의 말에, 미리 넣고 끓였더니 맛이 좀 먹기 힘들 정도로 이상해졌다. 그녀의 멋쩍은 웃음. 괜찮다는 말이 흘러나오는 나의 얼굴은 괜찮지 않았다. 사실 음식이 맛없는 건 상관이 없었는데. 괜찮다는 그 말이 괜찮지 않았다. 


 뜬금없이 난 물어본다, 내 생일 알고 있냐고.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사실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난방이 잘 되는 가게 안의 뜨거운 국물도 나를 따뜻하게 만들어주진 않았다.






#2 35도 그 이하




 밥을 다 먹고 카페로 향한다. 2층에 있는 그 식당에서 계단을 내려가며 내가 먼저 앞장선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진짜 이야기는 시작된다.


걸어간다. 다소 빠르게. 나는 평소 걸음이 빠른 편이다. 맞춰 걸을 생각이 없다.


캐럴 소리와 왁자지껄 즐거운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밀려오는 명동 거리.


그녀가 악동뮤지션의 노래 가사처럼, 일부러 몇 발자국 물러난 건지, 아니면 정말 걸음이 느렸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꽤 넓은 카페에 도착하였다. 2층까지 마련되어 있는, 크리스마스 연말 분위기 물씬 풍기는 반짝거리는 카페. 


밥을 내가 샀지만 커피도 내가 살 테다. 이것은 미안함의 심정인가? 알 수 없었다. 

자리에 앉는다. 그녀는 먼저 앉아있다. 말을 뗀다. 안 떼어진다.


나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부엌에 오랫동안 끼인 채 방치해 놓은 그릇 두 개처럼 들러붙어 있다. 아니 얼어붙어 있다.


누가 그랬는데, 조금도 고민 없던 것처럼 태연한 표정이, 아무래도 잊기 쉬울 거라고.


그게 되나. 나는 표정관리도 잘 못하는 사람인데. 모래성처럼 사르르 무너지는 너의 정신.



결국 이야기한다. 


그녀는 진심이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그럼 이 말을 농담으로 하는 사람도 있냐고. 


내가 생각해도 내가 정말 매정하네. 아무런 고민 없이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는 거 보면, 마음이 떠난 확실한 증거다.


언젠가는 그럴 거라 예상했으나 막상 이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러고는 손을 잡아달라고 한다.


나는 잡지 않았다.


애원한다.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냐고.


나는 잡는다. 그 손은 35도가 채 되지 않았다. 수족냉증과 차가운 날씨 탓이다. 


나는 망부석마냥 그대로 있는다.


한때는 입맞췄던 우리가 이젠 눈맞춤마저 힘든 사이가 되었다.


잠시 엎드렸던 그녀는 이내 나를 보고는 알았다며 갑자기 자리를 떠버린다.


나는 그대로 있다.




추위가 가시질 않았다.






# 37도, 미열이 난다.




 나는 슬프지 않았다. 




그저 나는 내가, 많이 봐 왔던 드라마 영화 속 이별 장면을 재연하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다. 


주접도 한번 떨어봐야 그것도 경험이 아닐까, 가장 감정적인 게 정상일 시기에 이성적으로 판단을 해 본 것이다.




코인 노래방을 가서 노래를 불렀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별일 없이 잠들었다.








다음 날 나는 늦지 않은 시간에 일어났다. 


어제 추운 상태로 오래 있었는지 약간 미열이 난다. 이불은 또 가장 푹신하고 두꺼운 걸 덮고 잤는지 땀이 흘러내린다. 좀 쉬어야겠다.




거실로 나와 보니 아버지께서 마침 뮤지컬 티켓이 생겼으니, 여자친구와 함께 보러 가라고 하신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꼴값을 몸소 실천하고 싶었다.




혼자 보러 갔다.




지하철을 타고 혜화역에 내려 걸어갔다. 걸어가는 도중, 누군가 말을 건다. 어느 봉사 단체에서 나왔는데, 잠깐 시간 좀 내달라고.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기로 했다. 


활기찬 그분께서는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 왔다. 나는 성의껏 대답했다. 하이파이브를 하자며 손을 드시길래 쳐 주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사람은 나의 표정에서 나조차도 모르는 기분을 알까. 그래서 조금은 더 활기차게 나에게 질문한 것은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망상.





그 뮤지컬은 개그우먼 신보라가 주연이었다. 90년대 대중음악과 접목시켜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는 구성이었다.


갈등이 있는 장면은 있어도 슬픈 장면은 별로 없었다.  


여자 주인공에게 '너는 나의 내일이야'를 외치는 남자 주인공.




나는 슬프지 않았다.


그저 슬픈 공연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숱하게 본 영화, 뮤비, 소설 속 주인공을 따라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날 더 심한 몸살에 걸릴 줄 알았던 나는, 다음 날 몸이 개운해졌고, 미열도 사라져 체온도 정상으로 내려갔다.








# 36.5 도 




2020년 초, 천호역 인근의 한 카페.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다시 보지 못했다.




나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흔한 SNS 염탐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나이기에,


그날 역시도 궁금하지 않았다.


마스크를 끼고 있었지만, 헤어스타일과 체형이 틀림없었다.


천호역은 중간 지점이라 자주 만나던 곳이다.




하지만 날씨도, 나의 옷차림도 완연한 봄이었다.


나의 마음은 굳이 더 차가워질 필요도, 뜨거워질 필요도 없었다.


인간은 정온 동물이고, 나의 온도는 일정하다.




요즘 나는 열도 잘 안 나고, 아프지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계란 토스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