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영화와 함께
정말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라는 말을 그만하고 싶지만 그만한 말도 떠오르질 않네요.
당신께 이어서 편지를 쓰는 것이 맞을까, 당신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리고 앞으로 써 내려갈 당신을 바라보는 편지들이, 그 햇볕을 찾아 꼿꼿이 허리를 펴고자 하는 이름 모를 꽃과 같은 그 편지들이, 당장이 아니라도, 당신이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라고 믿고 쓰는 거라는 거, 제가 말하지 않아도 지금 여기까지 글을 본 이상 느끼고 있겠죠?
제가 불확실함을 명료함으로 이렇게 바꾸어 버리는 건,
자진 납세하는 솔직함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허점을 지적하는 걸 사전에 차단해 버리는 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다시 쉽게 말하면 당신을 위해 쓰는 거, 맞아요. 그러니 헷갈려하지 말아요. (조금 전에 불확실함의 관계성에 대한 영화를 보아서 그 영향도 있나 봐요)
그리고, 이소라라는 가수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라는 노래를 들은 것이 결정적인 영향이 되었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느껴서가 아니라, 편지라는 건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매개물이지 사랑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어서에요. 그렇다고 사랑이 없을 거라는 말도 아닌 거니까 제 의도를 섬세하게 받아들여 주면 기쁠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이라고 믿으니까 이렇게 용기를 내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편지는 당분간 지속될 거예요. 이제 저의 모든 결정은 끝났으니, 이 편지 그 자체로 부담이 되지만 않길 바라는 수밖에요.
저는 삶이 항상 위험과 보상이라는 생각을 해요. 큰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면 큰 보상이 따를 수도 있고 그만큼의 실패를 할 수도 있죠. 제가 공부하는 분야에서 자주 쓰는 단어는 trade-off 관계라고 표현을 해요. 그 키워드로 검색하면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삶의 원리라고 믿었던 것도 예외는 있나 봐요. 당신에게 이렇게 마음을, 내 상태가 어떻든 간에 전달하는 거. 당신에게 반응이 온다면 정말 기쁘겠죠? 설명했던 trade-off 관계에 의하면 반응이 오지 않으면 기뻐할 만큼 슬퍼하는 게 정상이에요. 하지만 반응이 오지 않아도 괜찮은 걸요. 정말 괜찮은 걸요.
방어적 비관주의에 의하면 '최악을 생각하였을 때 감당할 수 있다면 시도하라' 고 하더군요. 어쩌면 내게 있어 돌아올 가장 안 좋은 수에도 의연한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 제가 당신께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있는 또 다른 이유일지도 몰라요.
이렇게 정말 길게 이유를 설명해 버렸네요. 이제 제 얘기를 해볼까 해요.
음, 사실은 요즘 글이 진짜 잘 안 써져요.
그리도 좋아하던 이상적인 글들, 이를테면 최유수 작가의 '사랑의 목격'과 같은 글을 다시 재밌게 읽을 수가 없는 거예요.
언젠간 찾아올 제동, 내지는 권태감이란 걸 잘 알고 있었죠.
이러한 매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고, 사람들과 함께하려고 하고 있어요. 나와 비슷한 길을 가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좋은 관계로 거듭난다는 게 정말 소중한 일이니까요. 남들과 다른 길은 그냥 설명해야 할 일이 많은 길이고. 평범한 사람이 가기엔 너무도 외롭죠.
저는 최근에 집이라는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더 이상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내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에요. 원하지 않던 그들은 나를 지켜볼 것이고,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 생각만으로 나는 입을 다물고, 그들과 거리를 두고, 외로움을 느낄 거예요. 피차일반이라는 것도 알지만, '왜 내 맘 몰라줘'는 그 무엇보다 간절한 외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많이 깨닫고 있어요. 싫다는 데 자꾸 하는 건 폭력이고, 그 폭력은 너무도 가까이서 보면 미약하지만, 마치 돌을 파내는 처마에서 떨어지는 방울진 빗물과 같아서 정신을 차려보면 나에게 아픔과 절망을 안겨 주니까요.
그렇지만 아직은 견뎌야 해요. 제가 이곳에서 받는 그런 심리적인 무너짐과 별개로 물리적인 도움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에요. 그들도 서서히 변해가는 걸 느끼기 때문에 언젠가는 빗물도 저를 향해 있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있기도 해요.
이런 생각이 들면서 당신이 떠올랐어요. 이게 제가 당신을 향해 글을 보내어 드리는 이유예요.
당신에 비해서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당신이 저보다 더 강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픔의 크기를 정량화하는 것은 어렵잖아요.
온전히 혼자가 되는 것이 불안하고 겁이 나 시도하지 못하는 나에 비해 당신은 그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어요. 당신이 이 글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지는 오묘한 순간이네요.
그냥 저는 당신의 외로움을 다시 한번 공감하게 되었다는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이 말을 당신과 마주했을 때 진심 어린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이 아니라, 편지로 쓰게 되어 유감스러워요. 하지만 또 그만큼 신중하게 표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로 위안을 삼을게요.
당신은 요즘 건강한가요? 유행병이 다시 돈다는데 잘 피해왔는지 궁금해요. 지난번에 건강하게 지내라는 그 말을 덧붙이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어서, 이렇게 또 덧붙이게 되네요.
자꾸만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은 그만큼 더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아까 언급한 영화를 궁금해할 것 같아 이야기를 해보자면,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예요.
당신에게 '미결'로 남음으로써 영원히 기억되고 싶다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랑의 방식에 슬픔과 안타까움이라는 물에 납득 한 스푼을 휘휘 저어 섞었더랬죠.
영화의 내용과는 거리가 있지만 또 그때 우습게도 당신 생각이 나더군요. 당신이 꼭 나에게 지금 미결로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영화 속에서 행간으로 돌려 말한 것으로 느꼈던 사랑한다는 말처럼, 나도 행간에 나의 의도를 남겨 놓고 더 이상 오늘은 이만 표현하지 않으려 해요. 여러 번 곱씹어 보길 바라요. 아까 이 편지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놓고, 정작 글을 모호하게 마무리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 웃기네요. 하지만 이 정도는 내 맘대로 할게요. 배려가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역설적으로도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는 나의 이 글은 짧은 시간 안에 완성이 되었어요.
다음번에도 밀도 있는 마음을 담아낼('흘려낼'이라고 하니 너무 초라해 보이고, '쏟아낼'이라고 하니 너무 여유가 없어 보였어요) 타이밍이 오면 그때 또 편지할게요. 우리가 보내었던 그 어느 때 보다도 밀도 있던 시간처럼.
나와 너 사이를 건너
넓게 빛날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