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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너별 Jul 25. 2021

부팅이 느리고 업데이트가 잦은 사람

 어릴 때부터 나는 느린 사람이었다. 일에서든, 대화에서든, 무언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든. 나의 느릿한 말투는 가끔 놀림을 받을 때가 있었고, 학창 시절 교실에 둘러앉아, 종례 시간에 다 같이 설문조사를 하고 먼저 낸 사람은 집에 가도 좋다는 선생님의 지시가 있을 때면, 마지막까지 남아있기 일쑤였다. 대학교에 들어가 시험을 볼 때면, 주어진 시간을 꽉 채워서 시험 감독을 하는 조교님과 함께 강의실을 나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른 시간에 시험을 마치고 나가는 이들을 볼 때면 그게 그렇게 신기하고 나아가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본인을 얼마나 믿으면 저렇게 확신을 갖고 본인에게 남은 기회들을 포기하는 걸까? 물론 각자의 사정과 생각이 있다지만, 시험이라는 단 한 번의 기회에서 '난 이제 더 이상 쏟아낼 게 없다'라는 느낌을 갖기에는, 나는 천천히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보이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었다. 


 최근에 공부를 시작한 이후로 컴퓨터 앞에서 있는 일들이 많아졌다. 아니 거의 상주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컴퓨터 부팅과 함께 나의 하루가 시작되고, 전원이 꺼짐에 따라 나의 하루가 끝났다는 생체 신호가 무의식 중에 전달되는 듯하다. 그 자체로 나쁘지는 않다. 왜냐면 적어도 나에게,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는 컴퓨터와 함께 하는 것이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덤으로 캠을 켜고 사람들과 함께 독서실에 있는 듯이 온라인으로 소통하며 공부하는 재미에 좀 빠진 것 같아서, 나의 데스크탑과 함께하는 이 삶은 제법 만족스럽다.


 하지만 부작용이 하나 있는 것이, 밤에 잠에 드는 데에 더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아마도 새벽까지 바라보는 불빛이 시각 세포들을 너무 괴롭혀서, 멜라토닌이 잘 분비가 안되어서 그런 것 같다. 자기 전에 불빛을 덜 바라보아야 잠에 훨씬 들기 쉽다는데, 그 잠에 쉽게 들기 위한 행동을 실천하는 게 쉽지가 않다.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밤이 깊어져도 피곤함이 깊어지는 것 같지가 않다. 그렇게 버티다 컴퓨터가 꺼지고 누우면, 나의 몸 안의 컴퓨터는 아직 꺼지지 않은 것 같다. 업데이트 중인가. 완전히 꺼지는 데에 오래 걸린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평소보다 심한 피로감을 느낀다. 수면의 질을 위해 낮에 운동을 해도 결과는 비슷하다. 이거 악순환인데. 좋지 않다. 


 차만 타면, 어디 기댈 곳만 있으면 바로 잠드는 유형의 친구가 있다. 함께 길게 여행을 간 적이 있고, 깨야 할 때 깨고, 자도 될 때 자는 그야말로 스위치 On/off 버튼을 누르는 듯한 그 친구의 수면 패턴을 곁에서 지켜볼 때면 참 부러웠더랬다. 그 친구와 달리 나의 수면엔 긴 준비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구구절절 길게 썼지만 그냥 예민하다는 얘기다. 나의 전원은 켜고 끄는 데에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성능으로 치면 오래된 컴퓨터 쪽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충전하는 데에 짧은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부팅에 오래 걸리는 사람. 툭하면 내 안의 성능들을 꽤 자주 업데이트를 해야 해서 바로 전원을 끄는 데에 힘이 드는 사람.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저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자기 전에 불빛을 보는 것을 자제하는 수밖에. 해답을 알고 있고 개인적으로 좋지 않다고 여겨지는 행동들은 대부분 우리가 알면서도 안 하는 것뿐이다. 야식을 먹고 바로 잠들고, 살이 찌고, 운동을 소홀히 하고, 휴대폰을 달고 살고, 불규칙적인 수면 패턴을 반복하고. 더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나열된 것들에 그저 반대로 행동하면 된다. 너무 쉽지 않나? 정답이 있는 문제. 하지만 그게 역으로 제일 어렵다. 이성과 본능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늦은 시간까지 컴퓨터는 자제하는 게 맞겠다. 나의 건강을 위해서다. 


다만, 부팅이 느린 나에게, 전원을 끄려고 치면 업데이트가 필요하다며 생각에 잠기는 내 안의 나에게, 넌 어찌 된 것이 잠까지 신중하게 자도록 유전자가 설계된 것이냐 하고 가벼운 웃음을 보내며, 복잡하고 바쁜 세상을 견뎌 온 나름의 치열함을 칭찬하며, 앞으로는 켜져 있을 때의 성능이나 더 좋게 만들어 보자 하고 어깨 툭툭 치며 제법 심심한 위로와 다짐을 건네주고 싶다. 자주 하는 업데이트가, 지금 당장은 급한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답답하고 속이 터질 수 있지만, 결국은 더 나아진 모습을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진짜로 중요할 때, 나의 능력을 펼쳐야 할 때를 위해서 그저 '한 번 더' 준비하는 그런 자세와 태도가 아니겠는가. 세상이 발달될수록 속력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데, 어쩌면 그런 면에서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오히려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닐까. 역으로 시대를 잘 타고난 사람이 아닐까.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게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늘 저녁은 다만, 노을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이내 이른 잠에 들고 싶다. 노을에 담긴 따스한 기운으로 무더운 날씨에도 포근한 보금자리와 함께 깊은 잠에 빠지고 싶다. 


업데이트는 잠시 미루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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