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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너별 Sep 09. 2021

전자기기 수리와 노을

일하랴 공부하랴 바쁜 당신에게

 얼마 전에 산 휴대폰을 빗길을 걷다 떨어뜨리는 바람에 액정이 깨졌다. 그래도 터치 잘 되고 못쓸 정도는 아니었으나 산지가 얼마 안 되어서 오래 쓸 요량이라 시일 내에 서비스센터로 찾아갔다. 갔더니 액정 수리비만 25만 원! 액정이라는 것이 금이 덜 갔다고 해서 비용이 덜 드는 것이 아니고 한 번에 교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깨져서 터치가 불가능한 수준이든, 아니면 조그만 흔적이든 간에 수리비는 같았다. 어쩌겠는가, 여기까지 온 이상 수리를 하기로 결심. 그 와중에 파손보험을 들어놓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근데 파손보험은 100% 금액 보상해주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이다.


휴대폰을 수리하는 시간은 30~40분이 걸린다고 했다. 맞다. 그 와중에 이렇게 글 쓰고 있는 것이다. 놀랍고도 당연한 것은, 30~40분이 걸린다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든 생각이 '기다리는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는데, 그동안 뭐하지'였다. 수리가 그리 오래 걸릴 줄 모르고 휴대폰 외에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밖이라는 공간에서 휴대폰이 없으니 이건 뭐 잠깐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나를 위한 능력들을 누가 잠시 떼어내어 빌려가 버린 느낌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전자기기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저 먼 우주로부터 운석이 하나 떨어져 우리 살고 있는 건물들, 기술들, 첨단 문명을 황폐화시킨다면 이 모든 발악이 말짱 꽝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이따금씩 한다. 아니면.. 원자폭탄? 드넓은 지구, 아니 빛의 속도로 팽창하는 우주에서 내가 그나마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서 행하는 몸부림은 멀어져 가는 저 별처럼 하나의 점으로 수렴해 가는 거 아닐까.


 쨌든 그래서 이 글을 어떻게 쓰고 있느냐 하면, 대기자를 위해 마련된 공간에 PC에 로그인해서 쓰고 있다. 결국 전자기기를 다시 찾은 건 어찌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술 더 떠서, 인터넷 창을 켠 순간 무얼 해야 할지 잠시 동안 헤매었다. 나는 내 노트북과 PC에 맞춤 튜닝(?)된 인간이 되어버렸기에 잠시 머릿속에 다른 메모리 공간을 열어야 했다. 그러고는 흘러나오는 대로 글을 출력한다. 깊이 고민할 필요 없다. 한 문장만 떼면 그다음 문장은 이전 문장이 대신 고민해 준다. 마치 인공지능 모델처럼. 그러다 보면 글이 어느새 완성되어 간다. 아, 어머니가 저녁도 안 먹고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뭐라 하시겠다. 수리 맡기기 전에 카톡이라도 하나 보내 놓을걸.  


 멍하니 가만히 있는 시간은 분명 아깝고 그 자체로 바람직한 건 아니다. 보통은 그 시간이 본인이 원할 때의 휴식시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내 몸뚱이와 함께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 무엇보다 먼저 비어버린 시간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한, 나의 자아에 대한 실소와 연민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온 것은 비단 나뿐만이 느낀 기분은 아닐 것이다. 세상은 정말 빠르게 돌아간다.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서 이상만 쫓아온 지난날들이 다시 떠오른다. 치고 올라오려는 후회는 금세 현재에 대한 만족감으로 저지당한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진심이다. 지금 느껴지고 살아지는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내가 걸어온, 개연성을 띈 길로 점철된다. 운명론 설파가 아니라, 지난날을 돌아볼 뿐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모든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노래 제목처럼 그건 아마도 우리의 잘못은 아닐 테다. 다만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하고 반성하는 길이 내가 발전하는 길임을 알고 있다.


 더 깊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기사님이 이제 수리가 다 되었다고 날 부르신다. 문득, 내가 바라본 내 모습이 불쌍할 때, 끼니도 거르고 일할 때, 너무 바쁘게 살아오는 나 자신에 대해 의미를 잠시라도 놓쳐 버리면 그 시간은 아마 후회로 남을지도 모른다. 이 글이 바쁘게 달려가는 여러분에게 잠시나마 작은 휴식을 주기를 바라며. 


 집으로 돌아가서 오늘 계획한 일들을 마저 할 생각에 좌절보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내 모습에, 짧은 시간 느꼈던 연민이 사라진, 이 오래되었지만 단단한 고대의 건축물 벽의 감촉과 같은 감정 속에서 오늘의 노을은 9월 9일의 아름다운 마무리로 품 안에 잠들 것이다.

붉은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붉은 빛깔 때문이 아니라 잠시 뒤면 사라지기 때문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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