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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너별 Nov 02. 2021

번아웃 탈출 매뉴얼(베타 테스트 버전)

컴퓨터처럼 나의 스위치를 on/off 하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몸에 힘이 없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와닿을 테지만 마음에 힘이 없다는 말은 다소 특별한 표현이다. 나는 종종 마음의 힘을 집중력이라는 말로 번역하여 스스로 생각하거나 주위 사람에게 나의 상태를 전달하고는 한다. 집중이 안된다! 쉬어야겠다!라고 속으로만 외치면서.

  지난주 일요일, 에 자기소개서 제출 데드라인에 맞춰 나의 사이트에 이것저것 번거롭고 아름다운 포장 공사를 하느라 마지막 남은 힘을 쏟은 것 같다. 마치 RPG 게임에서, HP를 조금이라도 남겨 놓으면 서서히 게이지가 차오르며 MAX 상태가 되지만, 다 떨어지면 경험치를 잃든, 아이템을 잃든 댓가를 지불해야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남은 한 방울의 마음 에너지도 모두 소진해 버렸던 것이다. 결국 내 의지와 관계없이 그 값을 치러야 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눕기. 그저 밥만 먹기. 졸리는 대로 잠자기. 과자 먹기. 진정으로 백수다운 며칠을 보내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쉬운 말로 '번아웃'.

 이번 상태에서 회복하는 데에는 5일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의지가 불타오른 이래로 가장 긴 쿨타임이었지 싶다. 그동안, 잠을 이 정도로 잘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잤다. 젊은 20대 남성인 나임에도, 평소에 하던 밖에 나가서 달리는 것도 왠지 힘에 부쳤다. 안 먹던 과자를 막 사서 자기 전에 먹고, 집에서 혼자 와인도 먹었다. 유튜브에서 동물 및 생존 다큐멘터리에 빠져서 하루 종일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만 돌려본 것 같다. 지상에서 가장 강한 동물은 코끼리고, 그다음은 코뿔소나 하마. 사자는 상위 포식자이지만 그들의 상대가 안된다. 혹성탈출에 나오는 침팬지의 반란은 뭔가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 같아서 무섭네. 범고래가 바다표범을 갖고 놀다가 잡아먹을 정도로 악랄한 사냥을 자행하는지는 몰랐다. 인간 세계에 살며 익숙해져서 동물들을 오랜만에 보니 좀 신기했다. 방구석에서 배 긁으며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는 우리는 대단한 세상에서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밀리는 해야 할 일들. 내려놓고 쉬고 싶지만서도 마냥 이러고 있을 수는 없기에 나는 최대한 빨리 상황을 탈출해야 했다. 2일 차에도, 3일 차에도 무언가를 시도했지만 힘없이 침대로 몸을 누일 뿐이었다. 몸이 안 좋거나 한 건 아닌데, 계속 자게 되고 마음에 힘이 없다. 아, 차라리 휴대폰 충전을 하듯 내 몸과 마음의 남아있는 힘들을 수치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확실히 쉬고 확실히 집중할 수 있다. 나는 그게 남들보다 더 어려운 사람인 것 같다. 관성이 너무 강해.

 저쨌거나 이번 일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며 던져 본 질문들은 아래와 같다.



1. 나에게 주어진 휴식은 꼭 필요한 휴식인가? 그저 시스템과 공동체의 부족으로 인한 게으름이 아닌가?

2. 얼마나 휴식해야 하는가? 잠을 보충할 수 있을 때 까지면 가능한가? 아니면 스스로 일어나 다시 흥미를 느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3. 징징대는 것도 한계가 있고 나에게 징징대는 사람이 있어야 나도 편하게 징징댈 텐데, 그런 사람이 없다. 근데 또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니, 징징대지 말고 혼자 버티는 게 나을 때도 있다. 근데 그 순간에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겠지라는 생각이 잘 안 들고 힘들기만 하다. 정답이 없으니 어렵고 고통스럽다.

    

3번은 다시 보니 '징징댐에 대한 주제로 징징댐'이구나. 고민 끝에 내린 결론, 다시 말해 나만의 번아웃 탈출 매뉴얼은 다음과 같다.


 번아웃은 내가 컨트롤하기가 힘들다. 체력적으로 당연히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번아웃이 찾아올 것 같다. 삶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밖에서의 변수가 너무 많으니까. 
쨌든 번아웃이 왔다 느끼면 그때 회복 기간에 대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번 건 3일이면 회복 가능할 것 같다."라고. 그러고는 3일간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하는 것 같다. 심지어 취미인 기타든 러닝이든 고민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든. 그리고 3일이 지났을 때, 나 자신을 잠시 떨어뜨려 놓고 마치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묻는다. "이제 할 수 있지?"
 상냥하게 물어야 한다. 나는 말랑한 놈이니까. 그때 내가 다시 꼿꼿이 설 수 있다면 베스트. 아니면 한 번 더 기회를 준다. "그럼 하루만 더 줄께. 진짜 맛있는 거 먹고 와라."

 억압하거나 방임하지 않고 '협상'한다. 마치 학생을 지도하고 아이를 키울 때처럼. 

 쓸만한 매뉴얼일까? 다음에 실험을 해 보아야 알 것 같다. 스위치 on/off의 삶, 이 또한 어렵다.
삶을 대하는 태도는 정말 이상(理想) 투성이다. 마음속에 항상 간직해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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