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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애할 권리 Nov 13. 2015

연출가 '박근형'

박근형 연출을 향한 ‘정치검열’이 위험한 이유

<ize> 기고 칼럼 - 2015. 9. 23

박근형은 한국 연극의 중심에 있는 중견 연출가이자 작가이다. 현재 국내 연극계를 주름잡고 있는 김광보, 최용훈, 이성열 등과 함께 ‘혜화동 1번지’ 동인 2기 출신으로 여전히 지치지 않는 행보를 하고 있는 연극인이다. 스물셋 때부터 30여 년을 연극과 함께 연극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이다. 기국서 대표가 있는 극단 76에서 배우로 시작했지만 일찌감치 극작과 연출에 재능을 보이며, 1986년 [침묵의 감시]를 시작으로 무대 뒤의 인생을 선택했다. 수십 편의 연극을 쓰고 올렸으며 [청춘예찬](1999)과 [경숙이 경숙아버지](2006)로 동아연극상, 대산문학상 등 국내 연극상을 휩쓸며 언론과 평단에 실력을 인정받았다. 극단 골목길의 대표로 박해일, 윤제문, 고수희 등 수 많은 배우들을 이끌어낸 장본이기도 하다.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 불리지만, 사실 박근형은 대본 없이 작업에 들어가기로 유명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간단한 시놉시스만 적어 연습을 하며 연극을 만들어간다. 글보다 말의 이야기인 셈이다. 배우가 가진 특징, 성격, 말투, 분위기를 캐치해 대사를 붙이는 작업을 한다. 그는 무대 위 배우는 편하게 연기해야 하고, 보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드라마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동시대의 공감 때문이다. 박근형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이자, 실제로 그의 작품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은 공감에 있다. 서구적인 가치관과 도시적인 캐릭터가 선명하게 드러났던 미국 희곡 [베키쇼]나 일본 고유의 ‘히키코모리’ 현상에 집중하고 있는 일본 희곡 [히키코모리 밖으로 나왔어]도 박근형의 무대에선 결코 낯설지 않은 이야기로 펼쳐져 공감을 자아냈다. 시대극이나 번역극이라 하더라도 연극을 보는 것은 결국 지금의 우리들이다. 극장에 온 관객들이 타성에 젖은 고루한 이야기, 저 먼 나라 어느 외딴 섬의 정체불명의 이야기에 울고 웃을 리 만무하다.

그냥 연극이 좋아서 무작정 판에 뛰어든 그답게 박근형의 연극은 겉멋 없이 솔직하다. 그가 만든 인물들은 거칠거나 미련하고, 차갑거나 뜨겁고, 행복하거나 우울하다. 애드리브인가 싶을 정도로 리얼한 대사는 형식과 관습에 얽매인 무대 밖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우리가 보는 시선, 우리가 듣는 말, 우리가 하는 행동을 박근형은 자신의 연극 속으로 끌어당긴다. 구질구질한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살이 닿아 생긴 열기가 꼭 관 속에 누운 것처럼 따뜻하다”고 말하는 아버지([청춘예찬]), 쥐처럼 종족번식을 하고 인간을 갉아 먹으며 배불러서 행복하다고 노래하는 가족([쥐]), 배신과 불륜, 무책임까지 종합한 한량 같은 아버지와 한평생을 희생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경숙이 경숙아버지])을 경쾌하게 보여줄 수 있는 건 박근형이기에 가능한 페이소스이다. 미치지 않은 척 위선에 떤 현실에 지쳐 있다가, 이것을 톡 터뜨려주는 연극을 보면 꼬인 속이 풀리듯 시원해진다.

“살짝 미치면 인생이 즐겁다. 이런 말이 있어. 그런데 그 살짝이란 게 어렵단 말야. 그 살짝의 적당한 선을 찾는 게. 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미묘한 경계 지점. 미치지 않았으면서도 미칠 수 있는 능수능란의 경지. 반대로 미쳤으면서도 한쪽 눈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돌아가는 세계의 사물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그 지점. 그게 어려운 대목이지.” 박근형의 희곡 [삽 아니면 도끼]에 나오는 ‘맨발’의 대사다. 그의 연극이 즐겁고, 관객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나 싶다. 최근 한 언론에 공개된 박근형 연출의 인터뷰를 보다가 마음이 서늘해졌다. “극도의 피로감을 느낀다. 조용히 연극만 하고 싶다.” 그리고 기사 말미를 장식한 “그만하자”는 말. 물론 사공 많고 난무하는 풍문에 대한 소리겠지만, 행여나 이런 상황이 연극을 향한 마음까지 번질까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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