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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애할 권리 Jul 17. 2016

이별에는 끝과 시작이 있다

영화 <데몰리션>을 보고...

영화 <데몰리션>은 상실에서부터 출발한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자. 하지만 그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왜 슬프지 않지? 이상하다. 분명 그녀는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인 사랑스러운 아내였는데.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다음 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다. 그의 장인은 그를 불러놓고 다그친다. 남자는 생각한다. 뭐가 문제인가. 저들은 내게 대체 뭘 바라는 걸까.


왜 그녀와 결혼을 했지? - 쉬워서
나는 그녀를 사랑했나? - 아니, 사랑하지 않았어. 그렇지 않다면 왜 슬프지 않지?
삐그덕 대는 문, 번쩍이는 전구, 물이 새는 냉장고.... 이것들은 대체 뭐가 잘못돼서 이렇게 말썽인거지?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낄 땐 그것을 전부 해체해서 처음부터 무엇이 문제였는 지를 알아야해...  


그때부터 그는 분해하기 시작한다. 아니, 사실상 파괴에 가깝다. 해답을 찾기 위한 그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것들을 발견한다. 사실상 늘 그의 주변에 있던 것들인데, 인지하지 못한 혹은 알면서 받아들이길 거부한 사물, 사람.


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현상을 전부 부셔버린 끝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민낯과 마주한다. 회사, 가정, 관계에서 그가 이상이라 생각했던 거대하고 완벽한 목표들이 전부 보잘 것 없고 쓸모 없는 것들로 보인다. 없어져도 그만인 것들을 부여잡고 살았던 지난 날에 대한 허무. 그리고 그녀를 향한 마음도 그런 이상 중에 하나였다는 걸 깨닫는다.


사소하다 여기고 외면했던 순간들이 텅빈 공간에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문득 그냥 웃어 넘겼던 그녀의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바쁜 척 그만하고 나부터 좀 고쳐줘'. 사실은 오래 전부터 망가져 있었을 지 모르는 관계,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다.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느라 놓치고 있었던 걸까.

사랑에서 이별이 그렇다. 상실을 경험하고 나서야 그 동안 걸어온 길에 구멍이 있었단 걸 깨닫는다. 특히나 이별을 통보받는 입장이 되었을 때,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닥친 변화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흔히 말하는 후유증이 찾아온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왜 그런 걸까? 언제부터 이런 걸까? 수만가지 질문이 답없이 머리에 떠다닌다. 수시로 드나드는 질문에 몸과 마음은 지쳐간다. 상대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정리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던 일상이 바보처럼 느껴진다. 슬프고 서럽던 감정이 점차 억울해지고 화로 바뀐다. 그렇게 며칠을 무질서한 감정 속에서 보낸다. 이별을 자각하는데 며칠. 문제를 찾기 위해 며칠. 해답을 찾기 위해 며칠. 인정하기까지 며칠... 당연히 몸과 마음은 엉망이다.


그렇게 허둥대는 동안 서로의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거대한 사건부터 시작해 점차 사소한 해프닝까지. 마치 흑백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과거를 되감아 내 모습을 회상한다. 그때의 내가 했던 말, 상대가 했던 말, 내가 했던 행동, 상대가 했던 행동, 내가 했던 생각, 상대가 했을 생각... 이때부터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옮겨간다. 인물들의 말 속에 담긴 이면의 생각이 들리기 시작한다. '괜찮아'는 '좋아'가 아닌 '나쁘지 않지만 좋지도 않아'였고, '미안, 일이 생겨서'는 '이제 그만 좀 놔줘'였는 데... 왜 당시에는 그 서늘한 온도를 감지하지 못했을까.


허무하게도 정답은 사랑했기 때문이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느라 더 잘보이기 위해 신경쓰느라 함께 있는 행복한 순간을 이어갈 생각을 하느라 바빴으니까.

사랑이 우연히 시작했을지라도 이별은 필연적이다. 영화 <데몰리션>은 그 필연적인 감정의 이별을 갑작스러운 물리적 이별을 통해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주인공에게 더 큰 한계를 심어두었다. 그가 그렇게 파괴하고 깨달은 건,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사소한 스크래치라고 생각했는데,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는 상처가 있다. 바로 약을 발라 케어해줬다면 나았을 상처인데 그냥 내버려둬서 그렇다. 금방 나아지겠지 하고 지워버린 생각을 상처는 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별은 언제든 올 수 있다. 갑자기 문득, 어쩌다 불쑥. 하지만 그렇기 전에 어딘가 숱한 긁힘이 있었을 것이다. 앞만 보고 가던 길을 찬찬히 돌아보면 그 작은 상흔이 보일 것이다. 심하게 아팠던 상처부터 때로는 언제 긁혔는지도 모르는 작은 상처까지. 아주 숨 가쁘고 황홀할수록 잠시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 그게 더 큰 상처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싱겁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어느 순간에 해야 할 인생의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기 위한 노력이다.



이별은 어쩌면 망가진 것을 고치기 위한 전환점일지 모른다. 다행이 마른 하늘의 날벼락 닥치듯 찾아오지는 않는다. 하늘이 흐릿해지거나 끈적한 습기가 밀려오듯 폭우가 내리기 전처럼 저마다 신호를 보낸다. 설마하고 그냥 집을 나서면 쏟아지는 폭우에 홀딱 젖기 마련이다. 적당한 선에서 회피하고, 사소해서 무시하고, 귀찮아서 외면했던 감정들은 앙금처럼 가라앉는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깨지기 전에 비워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깨져도 새롭게 교체해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만, 깨지면서 생기는 상처도 어딘가에 흉터를 남기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이별은 그 자체로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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