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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Oct 15. 2019

가능한 세상 중에 가장 좋은 세상을 위한 경제학 가이드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리뷰.



장하준 교수는 우리가 모두 경제학을 알아야 하는 까닭에 대하여 "경제학이 우리의 삶에 너무나 중요하고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몇몇 경제학 전문가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8세기 계몽주의자인 볼테르의 책「캉디드」에서 나오는 구절인 "가능한 세상 중 가장 좋은 세상"을 위해서는 하나의 망치(주류 경제학)로만 재단하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죠. 

그의 이러한 말은 비단 경제학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나 언론과 같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죠. 가능한 세상 중 가장 좋은 세상을 위해서는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일부에게만 우리의 세상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교양을 쌓아야 하는 까닭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지점입니다. 대학이나 혹은 상위 교육 기관에서 관련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지성과 비판적 방법을 통해 전문가의 곡학아세를 비판하고 그들이 좋은 세상을 위하여 노력도록 이끌 수 있죠. 지성과 교양이 몇몇 전문가가 자칫 잘못 휘두를 칼을 감시할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기에 정치, 언론, 경제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을 통해 감시할 수 있는 존재는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군에 있지 않지만, 비상시에 무기를 다룰 수 있는 예비군인 것처럼 가능한 세상 중 가장 좋은 세상을 꿈꾸기 위해서는 정치, 언론, 경제의 예비군이 되어야 합니다. 이 책은 그중에서 경제에 관한 책입니다. 모쪼록 보시고 적게는 세상을 이끌어 가는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으면 좋겠고 많게는 비단 경제학뿐 아니라 언론, 정치에도 비판적인 안목을 갖추려는 마음가짐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프롤로그

    장하준이라는 교수를 알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다른 저서인 『나쁜 사마리아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는 상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빗대어 이름을 만든 것이 독특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그 사람이 외국에서도 잘 나가는 지성인이며 대단한 집안이라는 것은 좀 더 나의 속물적 이목을 집중토록 했다. 더 인상이 깊었던 것은 그의 사상이 나의 반골(?)적 성격을 자극한 것이었다. 대학교 초에 배웠던 신고전주의 경제학 이론 또는 신자유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공부한 나에게는 아무래도 경제학이 과학적인 척 수식과 그래프로 그려진 것이 아무래도 싫었는데, 그의 책은 그러한 경제학에 관한 수식과 그래프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책이 전공 서로 나온 것이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교양 수준이 책이라 그래프가 빠져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겠거니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신선했던 것은 그의 책이 주류 경제학에서 말하는 세상과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책들이 내게 큰 반향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내용은 이미 우리 사회 주변에서도 많이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비롯되었을지 혹은 한국의 좌파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옹호 분위기를 비판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만, 당시는 FTA 협상이나 광우병 파동, 미선이 효순이와 같은 일들로 말미암아 미국 중심의 개방주의 정책이 비판과 비난을 받던 시기였고 친재벌 정책, 낙수 효과에 대하여 여기저기서 문제를 제기했다. 다시 한번 그의 다른 책을 더듬어 봐야 하겠지만, 당시에 읽었던 『나쁜 사마리아인』이나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와 같은 책들이 언급하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인상 깊었던 이야기 중 하나를 더 언급하자면, 주류 경제학 교과서였던 『맨큐의 경제학』의 저자인 그레고리 맨큐 교수의 수업을 일부 하버드 대 신입생들이 집단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버드 폴리티컬 리뷰’에서 수업의 편파적 사고방식에 대한 불만을 표하며 우리 사회에 불평등을 초래한 비효율적 체제를 영속화하는 특정한 관점을 지지하고 있기에 거부의 의사를 펼쳤다고 했다.

    나 역시 신입생 시절에 그의 책으로 공부했었기에 저러한 관점을 신입생 때 가진 것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에는 내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 대학은 어떻게 다니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기 이것이 신고전주의인지, 그 외 다른 경제학이 존재하지도 몰랐다. 그 당시 누구도 나에게 맨큐의 경제학 바깥에 다른 경제학이 있음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마르크스는 운동권에서 주창되는 이름이었고 그의 경제학은 애덤 스미스의 책과 함께 고전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고전이 그렇듯(?) 엄두가 나지 않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책이었다. 여하튼 내게는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와 운동권이 더 생각나는 단어였고 경제학에서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그렇게 경제학을 배웠으나 경제를 알지 못했고 신문의 경제란에 나오는 경제 문제를 그의 책을 통해 이해한다는 것이 다른 세상의 일 같았다. 물론 이것은 대학교 신입생이라는 특권(?)이 노는 것이라고 알고 있던 내 잘못이 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제학 책은 지루했고 수식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당시의 우리는 진리 탐구를 목표로 한 학교 교육의 일관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진리는 하나일까?

    “경제학자들은 과학자인 척하는 걸 좋아한다. 나도 종종 그러기 때문에 잘 안다.” - 그레고리 맨큐 


    그러나 진리는 하나일까? 어쩌면 적어도 자연 과학은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어떠한 사실의 집합으로부터 도출된 귀납적 법칙이 다른 유사한 사실에도 폭넓게 적용되어야만 이론으로 인정하는 환원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 수많은 검증을 거친 이론 가운데 지금의 패러다임을 만든 것들은 미래 후계자들의 양성 목적(?)을 위해 다른 과목들과 마찬가지로 교과서에 등재되는 영광을 거둔다. 그래서 그들의 교과서는 수많은 검증을 거쳐 등재된 교과서의 이론과 법칙에 관해 좀처럼 논쟁의 여지가 되지 않는다. ‘토머스 쿤’의 말처럼 교과서는 과학혁명의 안정화된 결과를 기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대의 정상과학 전통의 기반을 드러낼 뿐이라는 말에 반론을 제기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과학 혁명으로 말미암아 다시 쓰이기 전까지 말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교과서에서 배운 과학 지식과 이론이 서로 차이가 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만약, 교과서에 나오는 뉴턴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여 해당 현상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창조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분명히 바보거나 다른 차원에서 온 외계인이거나 보기 드문 혁명가일 것이다.

    경제학은 어떨까? 어떤 경제학은 경제학에 지나치리만치 과학적인 방법들을 도입하여 이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선보일 때도 있다. 이러한 경제학에서 수식과 그래프는 과학적 냄새를 풍기는 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스이다. 그 소스는 마치 굴 소스처럼 강해서 어디에나 잘 어울릴 것 같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잘 어울린다는 것이 진리라는 말은 아니다. 나 역시 장하준 교수의 말처럼 과학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자연 과학과 경제학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둘 다 어떠한 집단의 유사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그 이론이 영속성을 갖게 하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분자나 물체를 다루고 후자는 인간을 다룬다는 점이 다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경제학은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을 다룬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으며 때때로 비합리적 선택을 하거나 선택을 강요받기도 한다. 그래서 고전주의에서 신고전주의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이기적이며 합리적인 존재'라는 기본 전제는 언제나 비판을 당한다.

    우리에게는 『불평등의 대가』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맨큐의 책처럼 낡은 교과서는 정보와 위험을 다루는 금융 시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진짜 위험한 것은 “이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경제학을 배운 사람들이 규제나 경제 정책을 결정하려 드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38]

    진리는 그것이 세상 누구에게나 인정될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진리 탐구를 제일 앞머리에 두는 대학교에서 논쟁이 되는 여러 경제학 중에서 단지 주류 경제학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만을 가르쳐서는 안 될 것이다. 개인의 인격을 도야하고 사회와 인류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게 대학의 목적이라면 학생들에게 비판적 사고를 견지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시켜야 할 것이다. 주류는 주류일 뿐이지 진리가 아니며 굴 소스는 굴 소스일 뿐이다.

    장하준 교수가 이 책을 쓴 까닭도 이와 유사하다. 다양한 경제학을 알고 각각의 장단점을 이해하여 실제 경제에 대한 안목을 키우자는 것이 그의 중심 생각이다. 여러 경제 이론을 알고 있어야만 우리는 힘 있는 누군가가 경제 정책에 대해 “대안이 없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책 166p.]

    정부와 기업의 수많은 결정 뒤에는 어떠한 경제학 이론이 있다. 초이노믹스(Choinomics)에도 마찬가지로 어떠한 경제학 이론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 뒤로 로마의 정치인이었던 키케로의 말처럼 ‘Cui bono(누가 이득을 보는가)?’ 이다. 이 질문은 ‘국민을 위한’이라는 말 앞에 ‘어떤 국민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합리적 의사 결정을 방해하는 이들이 언제나 정치적 결정에는 존재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경제학이 "도대체 무슨 학문인가?" 물으면 많은 이들이 경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학문이라 포괄적으로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경제란 무엇일까? 동양적 의미로서의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말이지만, 사실상 현대적 의미의 경제는 일본에서 번역되는 과정에서 온 단어이므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경제가 안 좋으면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게 되므로 아예 관련이 없다고도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참고로 Economy가 처음으로 ‘경제’라고 번역된 것은 1862년 일본에서 출간된 영어사전에 ‘political economy’를 경제학으로 번역하면서부터이다. [http://www.korean.go.kr/nkview/nklife/2000_1/10_11.htm] 지금은 생소하게 들리지만 고전주의 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는 경제학을 ‘정치 경제학’이라고 불렀고 정치라는 말이 사라지게 된 것은 19세기 말 앨프리드 마셜을 비롯한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이 변화를 통해 신고전주의 학파는 자신들의 분석에서 주관적 가치 판단을 포함한 정치적(따라서 윤리적) 측면을 제거하고, 순수 과학을 지향한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그의 책 124p.]

    국어 대사전에 나와 있는 경제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ㆍ분배ㆍ소비하는 모든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이다. 그렇다면 경제학은 저러한 경제 현상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제학자는 경제는 ‘세상을 다루는 학문’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ㆍ분배ㆍ소비하는 모든 활동을 폭넓게 봐서)이라고 하고 또 어떤 학자는 ‘인간의 합리적 선택에 관한 연구’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애덤 스미스로부터 이어져 오던 전통적인 고전주의 경제학 이론과 현재 경제학계의 주류를 이루는 소위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규정하는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알다시피, 인간은 합리적인 선택만으로 재화와 용역을 생산, 분배, 소비하지 않으며 불합리한 선택이 한 사람의 인생의 극히 일부만을 차지한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사전적 정의를 보면 알겠지만, 경제학은 또한 단순히 돈을 연구하는 학문도 아니다. 또한, 재화와 서비스가 시장에서 거래되려면 생산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은 경제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으로 논의를 한정한다. 또한, 방법론이나 이론적 접근법이 아닌 다루는 대상으로 경제학 영역을 규정하고 성격을 정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인생, 우주, 모든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돈, 직업, 기술, 국제 무역, 세금 등을 비롯해 우리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수입을 분배하고, 그 결과 나온 생산물을 소비하는 것과 관계되는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책 33p.]

    복잡한 조립을 위해서는 단순히 망치 하나만 가지고 일을 하기 어렵듯, 그는 다양한 경제학파의 이론들을 보여주고 비교하고 대조하며 사용자가 장 · 단점을 고려해 경제라는 복잡한 조립품을 잘 조립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에게 경제학은 오로지 못만 두드리는 망치가 아니라 다양한 학파의 장단점을 이용하여 사회에 최선의 행복을 가져다줄 멀티 툴과 같은 것이다. 



    경제학 사용자 설명서?

    이러한 멀티 툴은 조건과 상황에 맞게 쓰려면 설명서가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원제는 『Economics: The User’s Guide』이다. 우리말로 하면 “경제학: 사용자 설명서” 정도 될 것이다. 저자의 권위(?)에 비해 책이 가볍게 느껴져서인지 우리말로는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여하튼 강의라는 말이 Guide보다 조금 더 권위적으로 느껴지지만, 맨큐의 경제학의 원제가 『Principles of Economics』 것에 비하면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전자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교양서에 가깝고 후자는 경제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을 위한 경제학 원론인 셈이니 그 무게감이 다르지 않다면 이상할 것이다.)

    보통 사용자 설명서는 휴대폰이나 장난감, 또는 그러한 제품들에 제공된다. 어떠한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조작 방법과 설명이 있고 나서는 사용자의 조작에 맡긴다. 물론 순서대로 따라 해야 하는 조작법도 있겠지만 어렵지 않으며 숙달되고서는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운영한다. 『Economics: The User’s Guide』는 그러한 의미에서 책이 추구하는 목적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는 수식으로 뒤덮이고 정형화된 연습문제를 풀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 안의 경제학이 아니라, 경제 주체인 개개인이 경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경제학 사용자 설명서를 제시한다. 그래서 사용자가 필요 없는 부분의 설명서는 제치듯, 시간이 없거든 특정 부분은 제치고 보라고 친절하게 설명도 해준다. 또한, 경제학의 다양한 방법(이라고 읽고 학파로 해석한다.)을 제시하여 사용자가 폭넓은 시각을 갖출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또한, 각 부분의 뒤에는 비록 연습문제는 없지만, 사회에서 실제로 쓰이는 숫자에 관한 [실제 숫자] 챕터를 각각 집어넣어 사용자가 현실 생활의 경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저자는 책임 있는 시민은 모두 어느 정도 경제학적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경제학적 논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특정 경제 상황과 특정 도덕적 가치 및 정치적 목표 아래에서는 어떤 경제학적 시각이 가장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갖출 수 있도록 경제학을 배우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책 15p.] 



    가능한 모든 세상 중에 가장 좋은 세상을 위하여.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어떤 쟁점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추고 토론을 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서로 다른 시각에 있는 이들이 함께 만나 다른 쪽의 주장과 의견에 귀 기울여 보다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대결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 나아가 그것을 바라보는 제삼자에게 어떠한 현안이 문제가 되는지 인식을 하게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표를 더 끌어 오려는 전략일 수도 있다.

    우리는 비판을 거부하고 토론을 하지 않으려는 한 권력자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자가 가져온 파장이 어떠한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지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주류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의 권력을 소유한다는 말과 같다. 권력을 소유하고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과 은폐할 수 있고 자신의 권력으로 반대 의견을 없앨 수도 있다.

    이것은 비단 살아있는 권력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학문이 주류가 된다는 것은 그 집단에 속해 있는 이들에게 권력이 부여된다는 의미이며 권력은 학문마저 통제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경제학은 정치적 판단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한 정치적 판단은 사회 곳곳을 넘어 경제학 교육 곳곳에서도 존재한다. 이는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언급한 ‘권력의 미시 물리학’[감시와 처벌, 59p, 나남]이라는 말처럼, 보이지 않고 신체에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으면서, 우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주류 학문과 그 권력에 복종하고 나아가 그 집단의 권력을 생산하고 강화할 수 있도록 훈육하고 있다.

    중세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단 한 권의 책밖에 읽지 않은 사람을 경계하라.”라고 하였다. 현대의 이 말은 “단 하나의 사상만을 옳다고 믿는 이를 경계하라.”라고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비판적 사고는 다름을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그것을 주도적으로 성취하고 생각할 때, 우리는 더 넓은 경제 현상을 이해하고 좀 더 좋은 세상을 가꿀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 책은 이를 위한 첫 마중물로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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