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에 이르러서

연재 소설 (5)

by Chris

나는 사실 무엇이든 잘 먹었다. 전라도에서 20년 이상 식당을 하신 어머니 덕분에 맛있는 음식을 늘 먹어왔다고 자부하지만, 그렇다고 미식가는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거라면 뭐든 잘 먹는 축에 속했다. 그 탓에 어머니가 나를 나를 지긋이 쳐다보며 맛이냐고 물어볼 때마다 그 말을 잘 안 한 건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내게는 배가 부르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까닭에 낭패를 본 적도 있는데, 저렴하면서도 배부르고 딴에는 맛있게 먹었다고 생각한 감자탕 전골집에 교수님과 동료를 데리고 갔다가 이들의 표정을 보고서야 나와의 기준이 다르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때 이후로 내 기준은 타인과 비교할 때 낮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누군가를 대접할 때에는 내 입맛보다 될 수 있으면 검증된 곳을 찾아 안내했다.

그에 반해 동생은 맛을 중시했으며 한 끼를 먹더라도 맛있는 것을 먹기를 좋아했다. 맛이 우선이었으며 돈은 나중이었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조금 아끼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같은 배에서 태어나고 요리를 잘하는 집에서 잘 먹어온 형제라도 입맛에 차이를 보이는 것을 보면 신기할 때가 있다. 대현은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면, 직설적으로 "돈이 없어서 그래."라고 딱 잘라 말하곤 했다.

이렇게 내가 까다로운 식성이 아니라 자유분방한 식성을 갖게 된 까닭을 생각해보면, 친구의 말처럼 돈이 많이 있어 본 적이 없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돈이 없다는 것은 선택지가 내게 주어진 별로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주어진 돈 안에서 최선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음식을 먹을 때의 고려사항은 맛, 가격, 장소, 분위기 기타 등등의 여러 조건이 있을 텐데, 내게는 가격이 가장 큰 고려 조건이 되었다.

다른 환경적 요인으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집을 나와서 산 까닭도 클 것 같다. 그 시절에는 용돈으로 생활해야 했고 대학 시절에는 아르바이트로 내 삶 대부분의 지출을 견뎌내야 했다. 돈은 빠듯하게 쓸데가 정해져 있었고 나는 지금의 먹거리로 영양소를 얻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때로는 약 한 알로 영양이 채워지고 포만감마저 느끼는 약이 개발되기를 바랐는데, 이점은 내가 먹을 것에 대하여 얼마나 무가치하게 여겼는지를 스스로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군대 훈련병 시절에는 식판에 남아 있는 것 중에서 먹어도 큰 지장이 없는 거라곤 다 먹었다. 생선 통조림에 있던 뼈나 먹고 남은 사과의 가운데 부분, 심지어는 고추나 다른 채소의 꼭지 부분까지도 다 먹었다. 배고파서라기보다 그것조차 영양이며 군에서 훈련이나 운동을 하는 와중에는 어떻게든 제한된 조건에서 많은 양의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는 하나 나의 강인한 정신과 의지의 표현이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여하튼 그때 그런 훈련 아닌 훈련을 한 까닭에 비위가 좋아진 것 같다.

또 하나는 차라리 마음의 양식을 채우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몸의 양식은 비만에 이르지 않을 적당한 양만을 가격 대비 효율적으로 섭취하고 남은 비용은 책을 사는 데 보탠다는 생각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책을 우선 구매하고 나머지 비용으로 먹을 것을 구매한 것은 아닌가 싶다. 이와 같은 습관으로 인해 무엇이든 잘 먹는,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 되었으니 나를 사랑하는 여인은 걱정이 없을 것이다. 소금국이라도 웬만큼 짜지만 않으며 물을 타서 맛있게 먹어줄 것이며, 먹을 것으로 티격태격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상대가 식탐이 심하거나 미식가일 경우인데, 이것은 사랑으로 극복하거나 돈을 열심히 벌어서 엥겔지수를 조금이나마 낮추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겠다.

잘 먹는다는 의미는 '영양을 효율적으로 얻을 만큼 먹는가? 포만감을 얻는가? 근육 형성에 도움을 주는가? 너무 과하지 않은가?' 정도의 의미이다. '맛있는가?'는 번뜩 떠오르지는 않는다. 이는 정말 뒷순위여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공기처럼 이미 흔하며 질문이라기보다는 전제로 깔고 가는 것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대현의 말처럼 내가 돈이 없어서 그렇다면, 돈이 많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미 학습이 된 터라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사교 목적의 식사를 좀 더 하게 되어 음식에 관한 소비는 더 많아질 거지만. 사실 먹는 것에 욕심은 없으나 먹는다는 게 단순히 영양을 섭취한다기보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면서 심리적 거리를 좁히고 편한 상태에서 마음을 나눈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기에 그런 상황에서의 식사라면 나는 언제나 찬성이다. 물론 이때에도 과한 것은 싫다. 사는 거라면 고마운 이에게 대접한다고 생각하고 할 수도 있겠으나, 상대방이 나를 위해 과하다고 여길 정도로 대접하면 오히려 불편할 따름이다. 나는 미안한 감정을 담아 이러한 기분을 표현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내 앞의 친구들은 언제나 자신이 먹고 싶어서 시켰다고 말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내가 그들을 대접할 때 돈을 개의치 않는 것처럼 이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거나 혹은 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혼자 먹기에는 어려웠던 것을 이 자리를 빌려 고르는 것일진대, 너무 내 중심으로만 생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여하튼 이런 말을 통과 의례처럼 듣고 나면, 결국은 맛있게 그리고 많아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다. 그래서 대현은 늘 나더러 거짓말쟁이라고 놀린다. 결국, 자신보다 더 잘, 맛있게 먹을 거면서 늘 안 먹을 듯이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말려도 사놓는 걸 어찌하겠는가? 그러면 눈앞에서 버려질 맛 좋은 음식을 그냥 놔두겠는가?

생각해보면, 이 논리는 자주 가는 식당의 이모와 실랑이할 때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언제나 많이 주시는 이모에게 그렇게 많이 주지 말라며 진심을 담아 하소연을 하지만, 결국 많이 나온 음식을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나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다. 단호하게 끊지 못하는 까닭은 그 음식 이면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배가 불러도 싹싹 긁어먹는다. 어느 날 시골에 놀러 갔을 때, 할머니가 살이 빠졌다며 사내는 많이 먹고 힘써야 한다며 스댕(스테인레스보다 스댕이라는 말이 더 정감있다.) 밥그릇에 밥을 잔뜩 담아 주시던 할머니처럼 다들 나를 생각해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게 내게 크게 내 위에 부담이 되는 정도는 아니기에 맛있게 해결한다. 한 친구는 내가 먹는 모습을 보면 복스럽다고 했다. 그렇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남들이 맛이 없어도, 배가 불러도 눈 앞에 음식이 있다면, 대체로 맛있게 먹는 사람이다.

이번에는 쓸데없는 쇼핑을 하진 말자고 했지만, 그는 초코파이와 과자를 몇 개 집어 들어 카트에 넣었다. 말렸지만, "네가 다 먹을 거야."라면서 집어넣는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듯하여 더는 말리진 않았다. 내가 어떤 유혹을 피하는 방법은 행동주의 심리학이나 행동 경제학적 입장과 많은 경우 궤를 같이한다. 말하자면 애당초 유혹이 될 만한 요소를 치워서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건데, 과자나 사소한 먹거리를 아예 구매하지 않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과자를 구매하여 집에 두면, 분명 눈앞에 존재하는 과자를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과자가 거기에 있어서 먹었다며 자신을 자책하고 다이어트를 위해서 더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가정이며 우스갯소리이기는 하나 미리 유혹될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려 일시적인 충동을 억제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렇듯 내 이성은 언제나 야성적 충동과 싸우고 있으며 이성의 불을 밝히려면 충동을 일으킬만한 것을 제거하는 게 도움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적당한 부족함이 좋다. 집에 먹을 게 부족하여 살이 안 찌고, 집에 에어컨이 없어서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나가며, 나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꾸준히 노력하니 적당한 결핍은 내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도록 하는 원동력이라 할 것이다. 내 의지는 언제나 하루 내지는 이틀짜리이며 망각을 밥 먹듯이 하며, 내 마음은 언제나 육체와 심리적 고통을 피해 쉬려고 하기에 차라리 내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무언가에 묶어둔다. 어떤 모임을 만들고 헬스장에 가고 일부러 멀리 있는 길을 걸어가면서 그 위에서 소리를 내며 영어 공부를 하는 까닭도 바로 그러한 이유다. 똑똑하지 못하며 의지 또한 부족한 자아의 상태는 이렇듯 내게 주변 환경을 이용하여 자신을 계발하도록 종용한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아침 글쓰기 모임을 만들지 않았다면 단언컨대 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예정했던 목적지인 장호항에 들어서자 아직 성수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표지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수없이 많은 주차된 차들이며 바닷가에서 해수욕하는 사람들, 뜨거운 태양과 푸른 하늘 아래 길게 늘어서 있는 파라솔과 텐트들이 보였다. 대현은 그나마 끝물이라 이 정도라고, 일전에 일찍 왔을 때는 차를 댈 곳조차 없었다며 웃으면서 말했다. 지난 몇 년간 해마다 이곳에 왔지만, 매번 성수기를 피해 왔기 때문에 나로서는 아무래도 생소한 광경이었다. 나야 백수라 언제 휴가를 떠나느냐는 그의 소관이었고, 그가 원할 때 나는 매번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여행을 연례행사처럼 찾아다니는 것을 즐기지 않을뿐더러, 탁월함은 한 번의 행동보다 꾸준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신봉하는 터라 여행이 아니더라도 내 삶은 의미 있는 일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상태이다. 물론 낯선 곳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영감이나 황홀감도 무시할 바는 아니지만, 침대맡에서 편한 자세로 누워 꿈나라를 여행하는 것 또한 영감과 황홀을 줄 수 있다고 여기기에 나로서는 꾸준함을 방해하는 잦은 여행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편이다. 그러나 대현이 제안할 때 한 번은 장난 삼아 안 된다고 빼더라도, 그의 여행 제안에 일상의 탁월해지는 즐거움을 제치고서라도 따라나서는 까닭은 그가 내 삶의 중요한 사람이고 그를 따라나서서 후회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언제나 내 경제적 사정을 잘 알기에 여행을 가더라도 알게 모르게 더 많이 부담한다.

좋은 친구에 대한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서 자신이 아플 때 욕해주거나 힘든 순간에도 장난을 칠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이면에는 그 정도로 가까워서,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으므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점이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서로의 마음을 완벽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안다고 여겨서 하는 행동들이 상대에게는 상처로 작용하는 경우를 비일비재하게 보아왔다.

가까운 친구는 자신의 지키는 고유한 심리적 선을 스스럼없이 넘나들며, 이따금 친구의 역린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건든다. 그렇게 넘어오면 상대 역시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행동을 한다. 서로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면서 '친구니까.'라는 마법의 단어를 쓴다. 상처를 주는 게 친구일까? 물론 심리적 장벽을 허물고 가까워지는 것은 친한 친구의 첫째가는 덕목이기는 하나, 그러한 장벽을 넘어서 친구를 할퀴는 행위조차 용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대체로 그러한 행동은 무의식적 장난이나 상대에게 '친하니까 그렇게 해도 괜찮겠지.'라는 자기중심의 안이한 생각을 하다가 일어나는 것인데, 친구라면 심리적 장벽 안으로 들어가 서로 의지하거나 기대도록 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이 사람이 내 마음을 다 알 것이라고 여기는 것만큼 조심해야 할 것도 없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배려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 행동 이면에는 '나는 너를 생각한다.'라는 마음이 은은한 꽃향기처럼 풍기어야 한다. 향기는 거짓으로 지어내거나 진정성이 없이 의도적으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만든 향기는 잠깐 속일 수는 있지만, 가짜 향기는 이내 시간이 지나면 대체로 들통이 난다. 대현은 그런 사람이다. 은은한 향기가 나는 좋은 친구이다. 그래서 나는 그와 그 향기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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