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14)
따분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살면서 만들어진 삶의 습관은 반복되는 따분한 일상을 살도록 권했다. 나를 만든 것이 나의 행동이었다면, 그 행동만 보자면 나는 실로 지루한 일만을 즐기는 인간일 뿐이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결코 벗어나는 일이 없었고, 그 안에서 흥미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한 세상에 그녀는 그러한 내 삶을 새롭게 해 줄 하나의 원동력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내 삶을 흔드는 그 어떤 것이 그녀에게 있었기에, 나는 그녀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 절제와 자격지심은 그녀를 눈앞에 두고도 어떠한 행동도 못 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실패 경험에 따른 두려움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 두려움이 언제나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소심함이 특성이 되어버린 인간이 되었다.
나는 도전하지 못하는 소심한 자신이 가증스럽고 역겨웠다. 그리고 이러한 가면 뒤에 보이는 추악함, 나약함에 몸서리쳐졌다. 이러한 까닭에 때로는 건실한 목표를 이야기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군가에게 눈을 반짝이며 설명하는 순간조차도 마음은 방황했고 확신에 찬 주장을 의심했다.
"창조적인 발상을 위해서는 사랑을 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글을 잘 쓰기 위해서 그 감정에 대해서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매번 자격지심으로 가지고 있으면 계속 머릿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맴돌고 다른 것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대현은 매번 이러한 말로 사랑에 대해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 나를 나무랐다. 지금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아예 사랑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에 관한 글을 못 쓰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대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것은 한 여성의 피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여성을 사랑할 때 가지게 되는 수많은 감각과 느낌,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또한 내가 그녀를 바라볼 때 느끼는 환희, 우리의 이루어지는 화학 작용과 변화, 서로 삶의 의미가 되어가는 과정, 우리의 감정에 따라 주변 환경이 과정 그 모든 구체적인 것들과 관계있는 이야기였다.
나 역시도 어디선가 본 듯한 시점으로 사랑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만의 시점으로 사랑과 성애를 표현하고 싶었다. 내가 보고 싶은 관점에서 내면의 안쪽까지 파고 들어가 볼 수 있고 필요에 따라 그 거리를 다양하게 조절하거나 혹은 줄여나가, 나만이 할 수 있는 하나의 문장에 표현하고 싶었다.
사실 누구나 그렇듯 사랑하는 여성의 내면을 보지 않고도 사랑을 하거나 헤어짐을 겪은 연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글을 나 역시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내가 쓰고 있는 것이 과연 맞게 쓰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러한 글을 쓸만한 자격을 갖추었나? 자기기만이 아닌가? 그러한 글을 쓸 때마다 부끄러움이 일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그 의심은 꼬리를 물다가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손을 놓아 버렸다.
물론 앞으로 내게 주어진 운명 안에서 남들처럼 사랑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 갈 것이다. 세상에는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소스가 있기 때문이다. 비단 사랑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다른 책들이나 영화가 아니더라도 그 수많은 것들이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세 가지를 엮어서 사랑을 표현하면 그것으로 나만의 스타일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매번 사랑의 판타지를 이야기할 때마다 어떠한 슬픔과 고독이 밀려오겠지만, 내 모든 신경세포에 존재하는 감각을 열어 받아들인 사랑에 대한 느낌과 그 표현을 일종의 스타일로 여기면 될 것이었다. 혹은 구체적인 묘사 따위는 관심 밖으로 미뤄둬 버릴 수도 있었다.
숙소에서 나와 검은 바다에서 해변으로 밀려 들어오는 파도와 어둠을 바라보며, 그와 나는 바다가 보이는 두칸짜리 계단에 걸터앉았다. 파도 위에는 구름으로 별과 달마저 없는 지독한 어둠이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가만히 있었다. 내게 오는 그 무언가가 내게 속박된 그 무엇인가를 잘라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잘라버리고 야성의 상태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살 수 있는 그러한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입에, 손에, 발에, 그리고 가슴에 묶인 그 보이지 않는 답답한 사슬을 끊어버리고 그냥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나는 나 자신이 도망치고 숨을 어두운 구석을 만들어 놓았고 그것을 절대 스스로 끊어내지 못할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사랑을 하지 않는 나는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일 뿐이었으며 그저 내 발에 달린 끈의 길이만을 길고 느슨하게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그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대현아, 난 그저 좋은 사람이 되기 싫다. 그런데 이런 나를 버리지 못하겠어. 차라리 누군가라도 다가와서 그저 내 이 마음을 끊어버리고 먼저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어. 그냥 내가 좋다고, 내게 불쌍해서 너를 위해 울어주겠다고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참, 용기 없는 나 자신이 우습지만, 그런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 싶어."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어? 너 자신도 못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쉽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결국 네가 먼저 움직여야 상대도 움직이는 법이잖아. 일단 뭐라도 저질러봐. 그러고 나서 생각해도 되잖아. 어차피 네가 좋은 사람이 되었던들, 그 사람 중에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돼? 없잖아. 결국 너는 그리워할 뿐이잖아. 머리로 아무리 생각한다고 해서 답이 나와? 결국 부딪혀봐야지."
내가 그렇게 부딪혀 봤던 적이 언제던가? 부모의 기대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겠다고 했을 때 다른 짐을 놓아 버린 줄 알았다. 돈 따위는 무가치한 것이며 그만큼의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고 믿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짐을 벗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사랑했던 이를 잡지 않고 그저 놓아주었을 때 나는 이것으로 된 것이며 나는 이로써 홀가분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내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이 떠나가 버리고 그리움조차도 마음에 묻을 때 나는 외로웠지만, 고독은 순간이며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코 나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버리지 못하는 찌꺼기들이 가득했고 그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그저 한쪽 구석에 박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볼 새라 그저 방문을 꽁꽁 닫아두고 누가 들여다볼라치면 빼꼼히 얼굴만을 보이고 나가지도 않고 방 안에서 다시 걸어 잠그기 일쑤였던 것이다.
문득 달리고 싶었다. 눈앞에 돌멩이를 하나 집어 냅다 바다 쪽으로 달려가다가 던졌다. 돌멩이는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차라리 이렇게 감정이라는 것도 손에서 떨어져 나갔으면 싶었다. 그러면 그저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 텐데……. 공허한 마음으로 고생하지는 않을 텐데……. 이 감정의 덩어리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싶었다. 그게 안 되면 저 바다에 몸을 던져버릴까?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방파제 주변의 마을에서 보이던 불빛도 하나둘씩 꺼져갔다. 길 쪽의 가로등만 불이 켜져 있는 상태였고 침묵하지 않는 바다만 '철썩, 철썩' 제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눈 앞으로 더 가까워진 광대한 바다를 보니, 언젠가 그녀가 내게 보여준 사진이 떠올랐다. 배경은 작게 나오고 그녀는 마치 거인처럼 크게 나온 사진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등 뒤로 찍어준 사진이라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모르나 마치 어떤 모험을 하기에 앞서 새로운 길을 가려는 한 존재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 구도는 약간 아래에서 그녀의 위쪽을 올려다보고 찍은 거라 그 모습이 마치 큰 산과도 같았다.
그녀에 대하여 유치할 정도로 찬미를 하자면, 실로 그녀는 이따금 거대한 경치를 감상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그래서 그녀를 보면 숨 막히는 산 정상에서의 감탄과도 같은 감탄이 나왔다. 또 그녀는 마치 유명한 미술관에 있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미술 작품과도 같았다. 온종일 보아도 지루하지 않았고 가까이 볼 때와 멀리 볼 때의 느낌이 달랐고 언제, 무슨 생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른 인상을 제공했다. 나는 그녀를 말하지 않고 하루 온종일이라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그녀는 머릿속에 계속 맴돌게 되는 훌륭한 시와도 같았다. 나는 그렇게 그녀를 마치 신앙처럼 내 안에 두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에 자리한 그녀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 깊게 생각나는 것처럼 그녀는 모든 공간에 있었다. 심지어 어떤 식탁에 떨어진 커피 얼룩에서조차 그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의식의 영역 안에 있는 모든 범주에 그녀는 걸쳐 있었다. 그러나 차라리 그녀만으로 세상으로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의 감정과 섞여서 더욱 우울한 색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 잔잔해지지 않는 눈앞의 바다처럼 무채색에 가까웠다.
아까보다 하늘에는 구름이 더 많아져 하늘로부터 떨어지던 빛들을 더욱 가렸다. 계단 아래의 가로등도 '팍'하는 소리와 함께 꺼졌다. 세상은 아까보다도 좀 더 검어져, 이제는 윤곽으로만 간신히 파도와 해변의 경계나 바위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많은 것들이 어둠 속에 가려졌으나 우리는 윤곽만으로도 우리가 몇 시간 전에 보던 풍경을 가늠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의 풍경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둠 속에서 보았던 그녀의 슬픈 모습이 떠올랐다. 먼 곳에 있는 가로등의 불빛이 그녀의 모습에 어두운 그림자마저 만들어 더 서럽게 보이던 모습이었다. 그저 그런 모습을 애처롭게만 바라볼 뿐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도 나는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그녀를 붙잡아주지도 안아주지도 못했다.
늘 그랬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언제나 적당한 간격을 지켰다. 사실 어떤 것이 그녀가 보내는 시그널인지, 그냥 친근함의 표시인지 잘 몰랐다. 나는 숙맥이었고 두려워했고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떠나가면?" 대현은 나에게 후회할 짓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로서는 "떠나가면 어쩔 수 없지 뭐."라는 자조 섞인 대답만을 할 뿐이었다. 누군가가 떠나가는 게 하루 이틀이었나? 한동안은 가슴이 뻥 뚫리고 잿빛의 거리를 걷는 기분이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할 일을 하고 나면 괜찮아지는 게 세상이었다. 조금만 참으면 되는 일이었다. 잿빛의 세상이 다시 노란색의 풍경이 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침묵하면 되는 일이었다. 검은 바다는 붉은 해가 뜨고 나면 곧 푸른색이 될 거고 나의 세상도 다시 그러할 것이다. 침묵하면 되는 일이었다.
좋은 사람으로만 기억되고 싶지 않다가도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올 때는 그녀의 기억에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녀의 이야기를 깊게 들어주며 그녀의 삶이 나로 인해 생기가 돌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로 인해 내가 얻게 되는 것은 그녀의 내면마저 그릴 수 있을 때까지 바라보고 들을 수 있는 기쁨이었다. 매번 그녀를 만날 때마다, 처음 만나는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그때마다 나는 그녀를 기억 속에서 다른 형태로 담으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렇게 나는 현실에서 유리되어 나로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미술 작품을 보듯 거리를 두고 아름다운 그녀를 최선을 다해 눈에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