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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an 10. 2020

인간은 욕망에 따라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파우스트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파우스트에는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전 이 말에 단어 하나를 더 추가해야 책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욕망입니다. 끊임없이 인간을 발전시키고 소유하게 하고 끝내는 덧없음을 깨닫게 하는 바로 그것. 그 욕망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얻고자 때로는 싸움꾼이 되기도 하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욕심쟁이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움켜쥔 것을 건네주지 않으려고 자린고비가 되기도 하죠. 그러한 것이 우리가 가진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일 겁니다. 인간은 욕망을 위해 노력하는 한 끊임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죠. 인류의 진보도 멸망도 다 거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만족하는 삶은 좋은 것일까요? 만족하는 삶이 오로지 가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욕망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을 가치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요. 그러나 좋은 삶, 나쁜 삶을 우리는 뚜렷하게 구별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마더 테레사나 간디, 슈바이처 같은 분들의 삶이 아름답고 본을 받을 만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제게는 이들이 주어진 것에 만족하면서도 가치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갈구했던 이들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파우스트와 함께 읽었습니다. 속세와 인간을 알고자 고행자의 삶에서 벗어나 속세를 삶을 살아가며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결국 덧없다는 것을 깨닫는 헤세의 싯다르타는 여러모로 괴테의 파우스트와 닮은 면이 있습니다. 파우스트 역시 속세의 것들을 알려고 자신의 상아탑에서 나오고 사람들이 소유하는 것들을 함께 경험하게 되죠.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아무리 물질적인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러한 인식은 조금의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촛불에 불과하죠. 속세에 사는 우리는 그러한 경험 없이는 물질에 대한 욕망에 우리의 정신이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순간 진리를 추구했던 싯다르타와 파우스트도 소설을 통해 소유의 삶의 덧없음을 경험하죠. 


최고의 것들을 소유했었지만, 만족하지 못했던 파우스트가 마지막에 눈이 멀고 타인을 위해 행하는 행동들(실은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소리였지만)을 두고서야 비로소 '순간아, 멈추어라! 참 아름답구나!'라고 하는 장면, 그리고 사탄과의 계약이 실행되었지만, 그가 지옥에 내려가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가는 장면은 우리에게 진정한 깨달음과 구원의 길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자문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소유하는 삶과 존재적인 삶. 물질의 세계에 사는 우리는 언제나 고민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순간순간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또다시 번뇌하고 맙니다. 등불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뛰어들고 마는 불나방처럼,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소유적인 삶이 공허함을 채워줄 수 없음을, 때로는 덧없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뛰어들고 소유하고 움켜쥐다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든 물질적인 것들과의 이별을 경험하죠. 영속적인 것은 어느 하나 없습니다.


《파우스트》는 그러한 고민을 해볼 수 있는 책입니다. 존재에 대해, 물질과 이상에 대해, 의식과 무의식에 대해, 가치 있는 삶에 대해 말이죠. 때로는 책 속에 나오는 다양한 존재들로부터, 때로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다양한 것들을 차례차례 소유하는 파우스트 자신으로부터 그러한 고민을 제시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정신세계 속에 메피스토펠레스는 존재합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존재로서 작용하죠. 신은 그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인간의 곁에서 인간을 시험해 볼 수 있도록 용인합니다. 신에게 있어서는 그것조차 자신의 권능 속에 있고 신의 가치를 증명토록 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은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간 앞에서 모든 물질도, 신화도, 욕망조차도 덧없는 것에 종속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파우스트는 소유에 대한 욕망을 벗어버리고 나서야 순간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천상병 시인은 그의 시에서 그가 돌아가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고 전합니다. 분명히 아름다웠던 시기도, 그렇지 않던 시기도 있었을 겁니다. 총부리에 억압받던 시기, 암울했던 시기의 시인이기 때문에 세상에 괴로웠던 적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그는 세상이 아름다웠다고 말합니다. 천상병 시인에게서나 파우스트에게서나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세상을 향한 감탄이고 창조주에 대한 찬미이기도 합니다. 말로 전할 수 없는 모든 만물의 행위에 대한 감탄이고 채울 수 없던 인간의 만족을 채우게 하는 그 무언가입니다. 헤세의 《싯다르타》에서는 그것이 그의 친구 고빈다가 마지막 순간에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맞춤하면서 싯다르타가 받아들였던 세상의 모든 인간과 고락을 보고 감동을 하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파우스트와 싯다르타, 그리고 천상병 시인의 시의 서로 다른 결말은 그 내용은 비록 다를지언정 그 본질에 다가갈수록 다르지 않은 이야기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문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면에서 서로를 다르지 않게 받아들이기 때문이겠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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