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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an 31. 2020

외로움에 관하여.

어느 순간엔가 모든 것을 다 버리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변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소중한 것들이 갑자기 무가치해 보였고 지금까지 붙잡으려고 노력했던 수많은 관계의 끈들은 내가 놓으면 언제든 놓아지는 것 같아 보였다. 사람들은 내가 안달해서 만나는 것처럼 보였고 그들의 주변에 내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갑자기 가슴이 뚫린 것처럼 공허함이 느껴졌다. 단순한 외로움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가슴 한쪽이 뻥 뚫린 느낌이었다. ‘아……. 이런 것이었구나.’ 때때로 어떤 소설에서 가슴이 뚫린 듯한 느낌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임을 알 수 있었다. 가슴이 뚫렸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답답함과도 같았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의 그 무언가가 없을 때 느껴지는 그 감정이었다. 답답함은 앞뒤가 꽉 막힌듯한 느낌임에도 그것이 가슴이 뚫린 공허함과 일치한다는 것은 조금은 신선한 발견이었다. 이러한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몰랐다. 혹자는 사랑만이 그것을 채울 수 있다고 했지만 어떻게 해야 사랑으로 채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시도하는 것조차 두려워졌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외면하려 했다.

나를 그저 공허함이라는 깊은 동굴 안에서 살도록, 뜨거운 햇빛을 보는 수고에서 멀어지도록 그렇게 두었다.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게 된 것이다. 소중한 것들이 쓸려가든 말든 이젠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사실 누군가 나를 북돋우려고 한다면 나의 체면을 굳이 차리지 않는다면 욕지기라고 언제든 해 줄 수 있을 참이었다. 그러나 체면은 아직까지는 나를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두었다. 그 체면조차 없었다면 이미 나는 뫼르소가 되었을 것이었다. 아니면 그 총알을 스스로에게 쏘았을 테지.

무언가에 집착적인 사람은 외로운 것이다. 외로움을 채우는 방법을 잘 몰라 집착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이다. 갑자기 급격하게 성격이 바뀌는 사람은 외로운 것이다. 교감을 통해 자신을 다스릴 수 없기에 감정을 강하게 표출함으로써 해소하는 것이다. 무기력한 사람은 외로운 것이다. 외로움을 이겨낼 방안을 잘 모르기에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이 외로움은 단순한 외로움이라기보다 공허함을 동반한 외로움이다. 왁자지껄 말이 많은 사람이라고 외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친구가 많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변에 사람이 적은 사람이 외로움에 더 강할 수 있다. 말이 많은 것은 집착의 하나의 형태로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며 친구를 많이 만들려고 하는 행위 역시 집착적 형태의 하나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이 없기 때문에, 혹은 그것을 만들기에는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공허감은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것을 다른 현실의 장막을 이용하여 가리지만, 언제든 바람이 불면 장막은 걷힐 수 있다.

공통의 의식으로부터 단절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기계 덩어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과 기계의 차이점은 정신, 다른 말로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인데 기계처럼 일을 하면서 의식의 단절을 경험한다. 내 의식대로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그대로 따라 해야 하는 것은 기계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성취해야 할 목표가 없어지고 그저 살아가는 존재. 단지 유기체라는 것 이외에는 기계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라는 인식은 자신을 무가치성을 극대화한다.

외로움은 이러한 자신의 무가치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기계와 달리 생각을 할 줄 아는 인간은 외로움 가운데서 자신을 뒤돌아본다. 그랬더니 나오는 게 글쎄, 결국 기계와 다를 바 없는, 더군다나 나를 믿고 의지해주는 존재 하나 없는 원자화된 인간인 것이다. 결국, 자신은 언제 없어져도 상관없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술로, 미디어로, 섹스로, 그 밖의 수많은 쾌락과 사회의 구조적 장치들에 의해서 이내 윤색된다.

자신에게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이 있는 자들은 그마나 그것이 힘이 되어 살아간다. 삶의 목표를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을 더는 것으로 하고 나를 의지하는 것들에 의지하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모든 짐을 덜어낸다고 하더라도 남아 있, 끝내 자신 버리지 못한 것들은, 외면하려 해도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걸린 마지막 잎새이며 존재의 이유 가운데 마지막까지 지울 수 없는 원죄와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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