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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Apr 08. 2020

불행할 수 있는 권리, 행복을 강요하는 사회

불행할 수 있는 권리, 행복을 강요하는 사회.


"행복한 가정은 누구에게나 비슷한 조건이 있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 다른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 톨스토이의 말은 어느 정도는 진리에 가깝다. 하지만, 기가 막힌 소설 속 주인공의 사연과는 달리 현실의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살 만하다는 착각과 세상은 냉정하고 참혹하다는 현실 인식 속에서 행복과 불행을 오고 간다. 실로 같은 현실을 바라보아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씁쓸하게, 참혹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현실이 참혹하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의 참혹성과 불행은 상관관계가 어느 정도는 있을지언정, 완벽하게 비례관계는 아니다. 행복과 불행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나 까레리나에서 그녀가 불행하다고 할 수 있는 까닭은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긴 그녀가 그 사랑에 대한 지극히 차갑고 용납되지 못하는 현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결국, 저마다 비슷한 행복의 조건 사이에서 불행할 수 있는 몇 가지 조건을 인식했기에 불행해진 것이다.  

문제를 인식한다는 것은 실로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적 결말로 다가오는 불행이 아니다. 오히려 불행의 조건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시련이다. 나의 삶이라는 소설 속에서 그 엔딩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재의 삶이 과거와 미래의 연속성 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극복 노력이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길뿐이다.


"우리에게는 불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야만인 존은 불행할 권리를 요구한다. 그것은 주인공이 어떠한 일을 극복하려면 불행이 주어져야 하듯, 극복의 대상으로서 불행이다. 불행의 권리를 요구하는 까닭은 그러한 권리를 통해 문제를 인식하고 불행의 조건을 해소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불행할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않는 사회라면 많은 경우 그 사회는 그 권리의 바탕을 이루는, 문제를 인식하는 힘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이다.

우리의 신체는 감각기관을 통해 느끼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면서 토끼를 떠올리는 것뿐 아니라,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의 시련을 보면서 우리와 우리 사회의 상황을 반추해본다. 그것은 분노와 기쁨 등의 다양한 감정을 발생시키며 이성의 작용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마치 밥을 먹으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똥으로 변해가는 것이 신체 구조 상의 메커니즘이듯이 우리가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도 우리의 두뇌 속에 담긴 메커니즘인 것이다. 그러한 메커니즘에도 불구하고 불행의 조건인 어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른 외부의 요인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마취하고 환각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다.

불행할 수 있는 권리를 저해하는 것,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 그 무엇을 일컫는 말은 각기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마치 바람이 피리를 통과하면 피리소리가 되고 나뭇가지를 통과하면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일으키지만, 그 자체는 바람이 내는 소리이듯 그것은 때로는 권력을 통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적 분위기를 통과해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사이렌의 노래처럼 풍랑 속에서도 환각을 일으킨다.

오디세우스는 키르케로부터 사이렌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고 나서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돛대에 자기 자신을 묶어 사이렌의 노래를 물리친다.


"이곳을 지나게 될 때 내가 사이렌의 유혹에 빠져 이 끈을 풀어달라고 명령하더라도 노를 계속 저어 가라."

사이렌이 주는 환각의 행복 속에서 그가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것이 결코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 환영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불행할 수 있는 권리를 적극적으로 선원들에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사이렌이 존재하는 바다 위에서 항해를 하고 있는 또 다른 오디세우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은 선원들의 귀에 밀랍을 씌우고 자신을 돛에 매고 고통에 발버둥 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물어볼 때이다.

불행의 조건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그저 행복을 강요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진정 불행한 사회이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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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난 무엇을 보았고 또 생각했기에 이런 글을 썼던 것일까?기억은 그렇게 잊혀지고 글만 남는구나. 지금도, 앞으로도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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