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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Apr 07. 2020

간판을 보며.

직접 내 손으로 붓을 들어 글씨를 연습하니 온 세상 간판 글씨가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꼬부랑 글씨부터 곧은 온갖 글씨들이, 물고기가 되고 바위가 되고 꽃이 되었다. 거기에는 물고기의 파닥거림과 바위의 단단함이 있었고 바람에 살랑거리는 꽃이 있었다. 문득 글씨를 알지 못하는 아이의 눈에도 분명 이것들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씨가 그림이 되고 그림은 글씨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의 내밀한 모습을 밝혀 줄 것만 같았다. 물고기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쓰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붓의 필치와 먹물의 농도, 표현의 방식에 따라 떼를 지어 바다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가 되거나 엄청난 힘으로 요동치는 활어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글씨 자체만으로도 그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형식은 사물에 대한 내밀한 관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 관찰이 사물의 본질을 향할 때 우리는 글이 갖는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힘을 제공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불변의 진리는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해당하는 존재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관심이 있으면 존재를 바라보고 관찰하게 된다. 그곳에서 발견되는 그 존재가 가진 독특한 힘과 매력을 느끼고 그 매력은 해당 존재와 그 존재와 유사하거나 연관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대상에 관심을 보이는 행위가 사랑의 첫 번째 조건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반대로 사랑이 식었다는 것은 관심을 보이는 행위가 점점 무관심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는 대상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사랑에 있어서도 형식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록 사랑한다 말과 글로써 표현하지 않더라도 사랑의 모습은 그 행위와 태도를 통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한 행위와 태도 가운데서 사랑한다는 말은 그 태도에 대한 확증적 작업일 뿐이다.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러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화려한 프로포즈 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잘된 동양화를 보다 보면 붓의 필치 하나가 강하게 또는 섬세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이것은 그림의 전체 가운데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것이며 그림을 결코 해치지 않는다. 사랑의 태도라는 형태 역시 그러한 맥락에 있다. 화려한 프로포즈를 요구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것을 해야만 사랑이라 인정하고 만족하는 것은 동양화의 느낌을 강하게 한다고 일부러 덧칠을 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러한 덧칠은 이따금 전체 동양화의 풍경을 해친다.     

때때로 형식이 내용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내용을 들어 말하지 않아도 보는 이들이 그의 의도를 깨우칠 수 있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마치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관찰할 때 자연의 거대한 섭리나 생과 사에 대한 고민, 신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말과 글로 설명을 하더라도 그 자체가 주는 모든 것에 이를 수는 없다.     


그림을 배우고 싶다.

화가가 된다는 것, 그러한 재능이 있다는 것은 신이 주신 엄청난 능력일 것이다. 그것은 대상을 다른 눈으로 관찰하고 느끼고 표현하는 행위일 테니까. 길을 가다가 흔들거리는 꽃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테니까. 하염없이 웃는 당신의 모습에서 이따금 느껴지는 슬픔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대가 없어도 어느 흔적에서나 그대를 발견하고 또한 멋지게 그려내어 한동안 환희에 빠질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그림에 재능은 없어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손으로 그리진 못해도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다. 우리의 인식은 왜곡되며 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계에서 손과 발, 온몸으로, 온갖 도구를 통해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표현하는 것이다. 관찰은 표현의 불완전함을 최소화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며 예술은 그것을 통해 불완전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된다.     


이 세계에서 물고기가 파닥거리는 모습은 실제 모습이지만 한순간이다. 머릿속에 기억되는 물고기는 실제 모습은 아니지만, 그 모습이 가진 인상은 오랫동안 기억되나 시간이 갈수록 왜곡과 망각이 거듭한다. 붓글씨로 표현한 물고기는 가상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예술로서 우리가 외면하지 않는 한 영원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상의 물고기는 우리의 기억과 인식 속에서 실제 물고기의 본질을 깨닫게 할 때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한 본질을 위한 관찰을 위해 나는 그림을 배우고 싶다. 그것이 나의 말과 표현의 한계를 좀 더 좁히고 또한 극복하는 방법이리라.     


오늘도 나는 간판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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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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