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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집

달리기에 의한, 달리기를 위한...

by Chris

이따금 귀찮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기도 한다.


어제의 달리기가 그러했다.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옷가지를 챙긴 찰나, 휴대폰에 뜬, ‘미세 먼지 매우 나쁨’이라는 희(?)소식에 어쩔 수 없이 신었던 신발을 다시 벗고 말았다.


하기로 한 것을 하지 않아서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대로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했다. 춥고 귀찮은 감정을 숨기기 위해선 더 많은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휴대폰으로 ‘미세 먼지 달리기’를 검색했다. 예상한 대로 거의 모든 글이 '자제'를 권고했다. 건강해지려고 하는 운동인데, 굳이 호흡기를 아프게 할 필요는 없었다.


‘에이, 가지 말자.’

실로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날 아침부터, '저녁이 되면, 꼭 뛰어야지!'라고 생각했던 바람이 마치 매몰 비용이기라도 한 듯, 아쉬움이 계속 남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덧 시계는 신발을 다시 벗었던 저녁 9시에서 10시가 되고 말았다.


뛰지 않았다고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의미 없이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안되겠다 싶어 다시 겨울철 달리기를 검색했다. 그러다 어느 유튜브에서 의사가 하는 말을 들었다. “온도가 너무 내려가지 않는 이상 추운 날에 더 달려야 해요.” 미세 먼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지만, 겨울철 달리기라는 말에 꽂혀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나가볼까? 마스크 쓰고 한번 뛰어보면 어떨까?' 집안 이곳저곳을 뒤져보니, 때마침 물건을 사며 사은품으로 받은 마스크 한 장이 눈에 보였다. 더는 어떤 생각도 하기 싫어 마스크를 쓰고 무작정 근처 운동장으로 향했다.


운동장에는 미세 먼지에 아랑곳없이 많은 사람이 있었다. 달리기하는 사람들, 축구를 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어린 연인들도 있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 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10km가 아니라 1시간 동안 일정한 속도로 달려보자.' 트랙에서 10km를 달릴 때 보통 38~39분 정도가 나왔는데, 그 속도가 일정하기보다 초반에는 빨랐고 5km 이후부터는 느려져 편차가 좀 있었다. 아마도 초반 스퍼트로 인하여 뒷심이 부족해지는 듯했다.

‘서브 3(풀 마라톤을 3시간 안에 들어오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4분 16초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했지? 그러면 오늘은 일단 1km당 4분 10~20초를 기준으로 일정하게 뛰어보자.’


빠른 템포의 경쾌한 스윙 재즈 음악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평상시 트랙에서 달리던 평균 속도로 보면 30초가량 느렸지만, 그만큼 호흡이 달리거나 지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하프까지는 일정한 속도로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40분쯤 지났을 땐, 몸이 풀리는 기분이 들어 더 빠르게 뛰고 싶었다.


추운 겨울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이 몸은 이미 열기로 가득했다. 안에 입은 바람막이는 배출이 안 된 땀에 흠뻑 젖었다. 12km를 넘어섰을 무렵부터 문득, 들려오는 음악보다도 발소리와 숨소리를 듣고 싶었다. 노래를 끄니, 일정한 간격의 발소리와 숨소리가 상쾌한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트랙의 흰 선들은 마치 두 발이 붓이 되어 리듬에 맞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계속 응시하니 눈앞의 두 선은 레일이 되었다. 그 사이를 달리고 있다기보다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전철 위에, 가만히 서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주변 환경 하나하나가 너무 신이 났다. 잠시 눈을 감고 발바닥의 감촉만으로 달려봤다. 계속 감고 있을 순 없기에 실눈을 뜬 채, 그 감은 눈 사이로 들어오는 흐릿하고 몽롱한 불빛을 따라 달려보았다. 세상은 점차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을 닮아갔다. 이번에는 몸 전체에 좀 더 집중했다. 팔과 어깨는 앞뒤로 흔들며, 특유의 반복적 리듬감으로 꿈을 꾸게 했지만, 지면에 닿는 발바닥과 허벅지가 상하로 움직이면서 살짝 그 몽롱한 잠을 깨웠다. 최면에 걸린 듯한 기분으로 앞으로 내달렸다. 차고 있던 시계에서 1시간이 다 되었다고 울리지 않았다면, 깨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오늘 나의 달리기는 뭐라 정의하면 좋을까? 평상시에 혼자 트랙을 돌 때는 기록 향상의 목적이 컸다. 남들이 잘 뛴다고 치켜세워줄 땐, 겸손한 척했지만 웃음이 입가의 주름을 비집고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10km 기록 내기가 아니라 안정화된 달리기로 목적을 잡으니, 거기에는 또 다른 기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의식의 껍데기가 벗겨지고 흰 오선지 위에 리듬만 남은 느낌이었다.


어느 시절 글을 쓸 때, 몸이 붕 떠오르고 자판과 내 손가락과 그리고 뇌가 하나로 연결된 것 같이 느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꿈과 실체 사이를 넘나들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런 기분이 들던 세계가 바로 달리기 속에도 있었다. 지면에 닿은 발만이 의식의 세계에 연결된 채, 나의 정신은 그저 무의식의 터널 속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걱정이나 근심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고, 생각은 비워진 채 오로지 하나에만 몰두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다.


달리기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몸을 씻고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았지만, 활성화된 몸과 마음의 흥분 상태가 계속됐다.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떴다. 어둠은 도화지가 되어 트랙 위에 길고 하얗던 선을 끝없이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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