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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집

바다가 좋았다. 아니 바다가 아니라 그녀가 좋았다.

단편 소설

by Chris

"이 바다에 온 게 어때요? 지금의 감정을 작가적으로 표현하자면?"

해운대의 아침은 저녁의 휘황찬란함은 온데간데 없고 조금의 적막과 한산함이 감돌았다. 그녀와 함께 걷는 백사장 앞으로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다정하면서도 조금은 어색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어떤 말을 해야할까 적절한 단어를 고르며 머뭇거렸다. 저 젊은 연인들이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애뜻한 감정도, 영화 '노킹 온 해븐스 도어'의 나온 죽기 전에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던 두 남자 주인공의 감정도 아니었다. 예쁘지만 예쁘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 거대한 바다앞에 어떤 숭고함이 머무는 감정도 아니었다. 그러기인 서글프게도 저 바다를 가로막은 인공조형물의 크기가 무척이나 컸다.

감정이 죽은 사람처럼 그저 "바다다." 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미 하늘 위로 떠오른 햇빛이 바다 위로 비춰 잔물결의 길을 길게 뻗었지만, 어떤 감흥도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바다였다. 그 앞, 넓게 뻗어진 해변 위로 나와 그녀가 잔잔한 잔물결처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된걸까? 저 바다를 보며, 잠시 고흐의 별이 빛나던 밤의 바닷가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건 그저 떠오른 상념일 뿐이었다. 이 아침에는 그저 내가 미치도록 껴안고 달콤한 말로 속삭이고 싶은 그녀와 함께 조용히 바다를 옆에 끼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 뿐, 어떤 감정도 상념도 이 현실에선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풋풋해 보이는 두 젊은 여인들의 사진사를 자청하여 예쁘고 찍어주고 다시 고개를 돌리고 내게 돌아왔다. 눈 앞에는 해맑은 장난꾸러기 같은 그녀가 보일 뿐이었다.

"작가님! 아직도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음,무슨 말을 할지, 조금은 부끄럽네."
"또 부끄럽다고 한다. 아니, 작가님이 표현을 할 줄 알아야죠."

장난스럽던 그녀는 어느새 나직하며 자애로운 목소리로 톤을 바꿔 말했다. 그러나 '바다 위로 태양빛이 잔물결을 이루며, 아침의 조용한 해변을 그녀와 내가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라고 단순해 보이는 말로 답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의미를 담고 싶다는 과도한 욕심, 지금의 이 순간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를 좀 더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다는 불필요한 작가적 허영심이 커졌다. 그런 허영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떤 것도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못하는 상태, 뭔가를 크게 하고자 하면 되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있었다. 그냥 아무말이나 뱉고 싶지 않았기에, 침묵과 동시에 나 자신조차 뜻모를 미소가 그 공간과 시간을 잠시 메꾸고 있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들리는 파도의 철썩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저 커피숍에 들어가고 싶어.

그녀의 말에 도피처가 생긴듯, 잠시 해변을 벗어나 반대쪽 인도 위에 세워진 커피숍의 문을 열었다.

따뜻한 홍차와 차가운 홍차 한잔을 각각 시키고 바다가 훤히 보이는 2층에 앉았고 그녀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에 아까 받은 질문을 꼽씹어 봤다.

바다가 보인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바다를 보지 않았어도 나는 잘 지냈고, 바다를 보아도 나는 잘 지내고 있다. 바다를 보러 온다한들, 그게 나의 인생의 경험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문득 18세기의 프랑스의 한 대부호가 이탈리아에 대한 동경으로 여행을 했다가 자기가 책을 통해 보고 꿈을 꾸며 상상했던 것과 달라 실망하고 소파에 누워 꿈을 꾸는 편이 낫다고 말하곤 다시는 여행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고 여행을 위대한 경험이라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또 그런 여행을 할 바엔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 보는 것이 좋았다." 로 시작하는 시 한 구절도 문득 떠올랐다. 그 시의 마지막은 이러했다.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나 역시 좋았다. 그리고 저 작은 짐승처럼 저 바다가 좋은 까닭이 뭔지를 계속 말없이 찾고 있었다. 시간이 좀 흘렀을까, 2층의 문이 열리고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해변에서처럼 그녀가 내게 작은 미소를 띄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자 눈앞의 바다는 그녀가 되고 나는 말없이 다가오는 걸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일이 그토록 멀게만 느껴졌는데, 실은 별게 아니었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수 년 동안 멀게만 느끼던 것들이 마치 그녀가 가까워지는 것처럼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다가 좋았다. 아니 바다가 아니라 그녀가 좋았다. 바다를 보며 좋아하는 그녀를 보는 게 좋았다. 그녀의 보거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하면 머리가 조금 고장난듯 아무런 생각이 안났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적절한 답은 찾았어요? 작가님?"
커피숍 문을 나서자 그녀는 찬 바람에 다시 생각이 난 듯, 내게 답을 달라고 물었다. 다시 고장나버린 머리로 간신히 답을 꺼냈다.

"그토록 고민하던게 실은 와보니 별게 아니었다랄까?
여기에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해보니 별게 아니었어. 내가 저 바다를 보고 느낀 건 그거야."

'별게 아니다. 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겁이 많았을 뿐, 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태양은 좀 더 높은 곳에 올라 바다 위에 반짝이는 다리를 만들었고 파도는 변함없이 해변에 짧은 혓바닥을 계속 낼름거릴 뿐이었다. 변한 건 그저 우리가 이 안에 들어섰다 것과 물음을 던졌다는 것,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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