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울적해지는 날 / 생(生)의 의지.

나의 일상 여행기. (45)

by Chris
사진: Photo by Ana Tablas on Unsplash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언어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어쩌면 온몸으로 하던 감정의 표현을 줄여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매일 똑같은 아침이 아니라고 스스로 말을 해도 이따금 마음이 울적해지는 날이면, 오늘은 전과 다를 바 없으며 내일도 딱 오늘만큼의 시간이 주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달려오던 의지의 끈을 느슨하게 풀게 된다. 그런 날이면 반복적으로 해오던 것들이 조금씩 틀어져버려, 의미 있다고 주장해오던 일들마저 다 쓰레기통으로 내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과 함께 쾌락 속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허우적거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 감정이 들 때에는 그저 해가 지붕에 이를 때까지 늦을 자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으며, 다짐하던 모든 것들을 침묵속에서 거부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마치 '사랑의 블랙홀'의 남자 주인공처럼, 내일 다시 똑같이 시작할 하루기 때문에 오늘은 그냥 죽음을 택한다.

한참을 잠들고 나서도 가벼운 연락 하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내 자신이 저 마른 나뭇가지 위로 보이는 참새 무리 마저도 못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인생은 지루함과 권태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어제 이들을 물리쳤다 하더라도 오늘 다시 찾아온다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바람이 머무는 골짜기에 바람마저 떠나 버리는 날이면 정말 모두가 떠났다는 생각에 내게는 희망 따윈 없다며, 어제는 다짐은 모두 꿈속의 헛된 생각이었을 뿐이라고 머릿속으로 되뇔 따름이다.

이러한 착찹한 마음은 6시 50분을 알리는 시계의 알람에도 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분명 이러다가 늦을 것이라는 자기 예언은 아침부터 나타난 우울감으로부터 끝내 실현되었다. 7시를 알리는 상윤의 카톡에 놀라 일어나 눈꺼풀이 무거운 상태로 가방을 들쳐메고 빨래 건조대의 양말만 하나 꺼내 들고 달렸다. 전신의 우울감은 나를 찾아주는 이의 알람을 듣고 정신없이 움직이고 나서야 조금 가셨다. 횡단보도에서 녹색불을 기다리다 문득, 아침잠에서 깨어난 아기가 서럽도록 우는 까닭은 '어쩌면 이루지 못한 전생의 헛된 꿈이 그토록 서글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는 공허감 속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을 받아줄 누군가를 향해 목놓아 부르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며 한다고 해도 찾아줄 이 또한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목놓아 울어주는 것도 축복이지만 내가 목놓아 울 때, 나를 받아줄 누군가가 있는 것도 축복이다. 대부분의 아이는 나이를 먹으면 그러한 존재로부터 독립한다. 그리고 겉으로 울기를 멈춘다. 자신의 감정 표현에 솔직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시작하는 때는 어른이 되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서이다. 비록 그때는 울지는 않지만 어린 자녀의 감정 표현에 비교적 솔직하게 반응한다.

언어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어쩌면 온몸으로 하던 감정의 표현을 줄여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비록 말은 못 해도 삶의 슬픔과 기쁨을 그토록 잘 전달할 수 있는 존재와 말을 할 줄 알면서 자신의 기쁨과 슬픔은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는 우울한 존재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겪어오면서, 어린시절 엄마의 품안에서 울쩍이다 잠들었던 그 때가 무척이나 그리워졌다. 온기가 남은 어머니의 가슴에서 젖을 빨며 그저 사랑하는 이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는 아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자신의 서러운 감정을 온몸으로 전달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기에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지금도 아기 시절의 그 감촉과 향기가 떠오른다면 그건 아마 지나친 환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 나는 그 환상을 느낀다.


우리나라의 자살률 통계를 볼 때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생기는가?'를 생각한다.


길을 건너 스터디룸에 도착하니 7시 5분 전후였다. 상윤이에겐 면접 보고 올라오거든 커피를 산다고 말했다. 오늘 다른 곳에서 스터디하는 날 아니냐고 물어보니, 내일 부산으로 내려가서 봐야 하는 면접 때문에 오늘 내려가야 한다며, 모임을 취소했다고 말했다. "오늘 너 출석 체크 원래는 안 하는 날이니, 나도 안 하겠다!" 라고 핑계를 댈까 하다가 마음 내키지 않아, 다시 한번 잘 다녀오고 올라오면 커피 마시자고 했다.

자리에 앉았지만 피곤함과 무기력감이 머리를 무겁게 했다. 가루 커피를 뜨거운 물에 평소보다 조금 타서 한 모금을 들이켜도 정신이 번쩍 뜨이거나 하진 않았다. 이 순간에 책 읽기도 의미 없이 느껴져 한동안 휴대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했다.

"30대 여성 취준생이 취업 스트레스에 분신자살했다네요. 점심을 준비하던 엄마가 너무 시끄럽게 한다며 말다툼하다가 엄마 보는 앞에서 분신자살했데요. 그걸 끄려던 어머니도 전신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호송되었다 하고요."

상윤이도 덩달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내게 말했다.

문득 가슴이 저렸다. 남 일 같지 않은 그 광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서로 소리를 지르는 엄마와 딸, 화가 나서 인화성 물질을 가지고 와서 몸에 뿌리고 불을 붙이는 딸, 그것을 보고 애가 닳아 온몸으로 끄려는 어머니….

나이 먹고서도 취업 준비를 하다가 끝없는 낙방을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죽고 싶은 기분이 뭔지를. 아마 상윤이 역시 그녀의 비참함에 공감하는 바가 있어서 내게 말했을 것이다. 물론 아직 남은 생을 자살로 마감하는 것이나 어머니 앞에 대못을 박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를 애도하는 까닭은 이 죽음이 그 전날에 보았던 일가족 4명의 자살과 그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내몰린 그들의 삶, 그로 인해 일순간 살아갈 이유를 느끼지 못해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 미래에도 이 상황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절망이 그들에게 있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 통계를 볼 때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생기는가?'를 생각한다. 자살이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서'이고 살아갈 이유를 희망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그 선택을 한 것은 일순간이라도 희망이 없는 절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토록 희망이 없는 사회인가? 무엇이 그토록 희망 없는 사회로 만들었는가?

빚 7,000만 원 변제를 못 해 일가족이 자살하고 오랜 기간 취업하지 못해 엄마 앞에서 자살하며 삶이 힘들다며 투신자살하려는 사람들…. 이들에게 당신들의 판단과 결정이 지금의 삶을 만들었으니 스스로 책임지라고 할 수 있는가?

사회안전망의 필요성 이상으로 그들이 생을 계속하게 하려면, 궁지로 내몰지 않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절망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영화 '쏘우'를 보면 살아남은 자들이 외려 쏘우에게 생의 의지를 심어줘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프리모 레비의 '무엇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보면 자기 주변의 아우슈비츠 수용자 중에는 그러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살을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쏘우의 경우 영화적 설정이며 프리모 레비는 개인적 범위 안에서의 경험이다.

이러한 사실은 생의 의지가 단순히 선진국의 복지와 같은 사회적 안전망으로만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사회적 복지의 목적이 생의 의지에만 있는 게 아니며 여러 면을 고려하기 때문에 사회적 복지는 꼭 필요하다. 이 장에서는 사회적 복지에 관하여 말할 건 아니다. 그저 생의 의지에 관하여 간단히 말하면, 이는 버티면 언젠가 이 상황은 끝나고 또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관계된다.

이는 적자생존의 본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다위니즘의 토대 위에 있는 시장 자본주의 경제학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 시대에서는 벗어나기 어려운 적자 생존이라는 시장경제적 토대 위에서 자살률을 줄일 방안을 찾을 수 있음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것은 약육강식의 법칙이라며 사람들을 절망으로 바로 내몰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적응할 수 있는 혹은 변화할 수 있는 기간을 충분히 주는 것이다. 갚을 수도 없는 높은 이윤으로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 취업 시장의 거대한 문턱에서 끝없이 좌절하는 이에게 기회를 주는 것 또한 사회적 안전망임과 동시에 생의 의지를 실현해주는 도구이다.

요는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주어야 한다.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오로지 그 빛을 따라 앞길을 나아갈 수 있도록 의지를 주어야 한다. 그 빛이 크고 작은 것은 그 의지를 더 높이느냐 줄이느냐와도 관련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빛의 존재이다. 중세시대에는 하나님이 빛이었으며 지금의 시대에는 개인이 더듬거려 찾아내야만 하는 빛이다. 그래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사회이면서 동시에 살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어느 때보다도 어두운 사회이다. 우리는 이 거대한 세상과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변두리에 존재하는 티끌보다 못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 티끌 속에는 무한한 우주가 내재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우주로 인해 누구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며 믿음에 따른 실천이다. 그런 우주를 가진 당신을 사랑한다. 이 우주 속에 항상 당신만의 빛이 존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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