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기억하라. / 책의 수수께끼를 발견하는 재미
나의 일상 여행기. (46)
사진: Photo by Jenny Hill on Unsplash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어제와 다를 바 없이 간신히 일어나 부리나케 짐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얼마 걸었을까 이상하게 허리 왼쪽이 아팠다. 걸을수록 점점 더 아프더니 왼쪽 다리가 조금 저린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고통은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으로 기다시피 병원에 갔을 때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허리가 휘어 있었다. 디스크냐고 물었더니 담당 의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했으나 사진으로 볼 때, 눈에 띄게 휘어져 있었고 그 덕(?)에 물리 치료를 꽤 오랫동안 받았다. 그 이후로 기존에 헬스장에서 하던 운동 프로그램 전체를 코어 중심의 운동으로 바꾸었고 운동 전후의 근육을 유연하게 풀어주는 스트레칭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방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한동안 괜찮았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운동을 꽤 오랫동안 쉬게 되면, 해마다 오는 감기처럼 잠깐 이런 현상이 오곤 했었다. 이런 일이 보통 운동을 하지 않을 때 오는 까닭을 생각하면, 매일 잘못된 자세로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있는 게 화근이 아닐까 싶었다. 그나마 운동할 때엔 꾸준한 코어 운동과 스트레칭이 위험을 줄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평상시 앉은 자세는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불량스러웠고 몸이 아프지 않을 때면 매번 바른 자세를 망각했다. 이렇게 아플 때마다 바른 자세를 하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허리 통증은 허리에 누적된 피로가 쌓여서 어느 순간에 통증이 일어나는 듯했다. 늘 그렇듯 한번 그렇게 일이 터지고 나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한번 일어난 일은 두 번 일어날 수 있었으며 차후에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비를 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날 순간의 충격 때문에도 다시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하인리히 법칙이라고 있다. 1:29:300의 법칙으로도 유명한데, 하나의 대형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29가지의 작은 사건이 있고 300개의 조짐이 있다는 이론이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의 대형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여러 사고와 조짐들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고 조금은 과한 해석일지도 모르나, 이 법칙은 나의 허리 통증에도 적용 가능하다.
이 고통이 나의 디스크 증세의 29가지 전조 중 하나일지, 아니면 커다란 하나의 고통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건(?)이 있기까지 앞으로 나의 허리 고통이 있을 거라고 의심되는 정황은 계속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괜찮겠지 생각하다가 발생한 고통이었다. 다만, 이렇게 불현듯 찾아올지 몰랐을 뿐이다.
거의 모든 대형 사건들은 이렇듯 그 조짐을 보일 때에도 안이하게, 즉, '설마, 괜찮겠지.'라고 생각할 때 발생한다. 큰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면 주의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그 일이 발생할만한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허리 고통에도 적용될 것인가? 이러한 대형 사건의 전조가 무거운 것을 혼자 들거나 안 좋은 자세 때문이니까 무거운 것을 들지말고 자세를 바로 한다고 하여, 허리 통증이 안 생긴다는 보장이 있는가? 이런 생각 끝에 얻을 수 있는 결론은 29가지의 작은 사건에 대비하고 주의를 기울인다고 하여 하나의 대형 사건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발생 확률을 줄여준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경험이 값진 까닭은 바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때 있다. 300여 가지나 되는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이것이 앞으로 발생할, 더 큰 일의 징조임을 깨달을 때에만 비로소 경험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지금 내 허리의 고통은 그 까닭으로, 장작에 누워 있는 것과 같으며 쓸개즙을 마시는 것과 같다. '메멘토 모리'라는 말은 있으면서 '메멘토 돌로(고통을 기억하라.)'라는 격언은 없을까? 때로는 죽음보다도 죽지 않은 고통이 더 괴로운 것일 수 있고 이 고통이 생의 의지를 이끄는 원동력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망각해야 할 일이 있으며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지금의 고통은 망각해야 할 것이 아니다.
망각에 관하여 조금 더 이야기 하자면, 개인이든 사회든 잊어야 할 일은 잊고 기억해야 할 일은 기억해야만 진보한다. 삶은 망각과 기억의 연속이다. 시간이 흐르면 슬펐던 기억도, 기뻤던 기억도 모두 잊게 되고 그저 그때의 감정만을 기억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경험이 과거의 어떤 감흥을 일깨우게 되면 우리는 바래졌던 기억의 한 페이지를 다시 찾아 눈시울을 붉히게 된다. 절대 잊지 않겠다던 그 순간마저 잊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먹먹해지는 감정에 눈물을 쏟을 것이다.
망각은 모든 것을 침묵케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이 침묵의 길에 다시 들어서게 될 때 나는 어린 시절 묻어둔 값진 보석함을 하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기쁨과 환희의 감정, 슬픔과 고통의 감정이 묻어 있는 그런 보석함들을.
상윤이는 지금쯤 부산에서 일어나 면접을 보러 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문득 혼자 있는 이 공간이 외롭게 느껴졌다. 허리도 점점 더 아파져 아무도 없는 긴 테이블 위로 등을 기대고 다리를 접어 무릎 쪽으로 잡아당겼다. 엉덩이의 긴장감이 느껴지면서 허리도 펴지는 것 같았다. 조금은 고통스러웠으나 또한 시원했다. 고통스러움이 쾌감으로 바뀌게 되는 경험이 이런 걸까? 때로는 변태 같은 영화를 보면 폭력과 쾌감을 동반한 일을 벌이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사디즘이라고 말하는 이 행위에는 폭력과 에로틱한 모습이 동시에 연출된다. 구속과 속박, 폭력, 물리적 고통이 정신적 쾌감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 것인가? 혹시 이는 마치 달리기 선수들이 극한을 경험할 때 느끼는 러너스 하이의 증상과 비슷한 것일까? 그러한 고통 속에서 인간의 뇌는 그 고통을 잊으려고 엔도르핀을 분비한다고 한다. 달리기 선수는 마약성 진통제의 최대 100배에 이르는 이 호르몬으로 말미암아 고통도 잊은 채로 달리기를 계속한다. 어쩌면 사디즘적 쾌감 역시 그런 부류가 아닐까 싶긴 하다. 아무래도 관련 자료를 좀 찾아봐야겠다. 여하튼 그러한 일종의 쾌감은 우리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손톱 주변의 살을 뜯어냄으로써 느끼는 쾌감, 딱지가 진 곳을 계속 뜯어내어 결국 피를 보는 쾌감, 손을 꽉 쥐어 피를 안 통하게 하다가 서서히 풀어줄 때 느끼는 쾌감들이 그렇다. 어쩌면 사디즘적 쾌감은 이런 것들의 극대화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와 엔도 슈사쿠의 '침묵' 에 이어, 다음은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고른 책이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법'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지금 당장 논문을 쓸 생각이 없어서 그런지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 책을 고른 까닭은 사실, 그 제목보다 저자가 어떤 방식으로 치밀하게 생각했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훌륭한 책은 단순히 하나의 주제만을 담고 있기보다 다양한 인용과 사고 과정을 통해, 다른 책에서 핵심으로 다루는 요인을 적절하게 배치한다. 이 책이 논문 작성의 방법론을 다룬 책임에도 사회 전반에 걸쳐 널리 읽히는 까닭은 바로 그런 훌륭한 책이 가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좀처럼 그전에 읽었던 책들만큼의 열정을 스스로 보이지 않는 까닭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그 책만큼이나, 나를 기다리는 좋은 그리고 시의적절한 책들이 많기 때문이다.
책읽기의 권태로움을 극복하려고 전자책을 켜서 구매한 다른 책들을 훑어보았다. 소설을 한 권 읽고 싶었다. 문득 며칠 전에 구매하여 아직 따끈따끈한 프랑스와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눈에 들어왔다. 엘레강스(?)한 제목과 표지가 마음에 들어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 책을 떠올리면, 언제나 모 여자 아나운서가 휴가를 다녀와서 공항으로 들어올 때 손에 들고 있던 게 생각났다.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손에든 이 책만큼은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다운받은 책을 실행하니 별로 두껍지 않았고 하루 만에라도 다 읽을 분량이었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발췌를 하고 다시 나만의 스타일로 그 부분을 각색할 예정이었기에 족히 일주일은 걸려 읽어야 할 참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글쓰기의 표현력을 기를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거니와 왜 작가가 이러한 표현이나 대화를 삽입했는지를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영화에서 보면 하나의 장면에 배치한 사소한 미장센조차도 그 장면이나 영화의 느낌과 감정을 살리는 데 이바지하듯, 문장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 소설의 느낌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소설의 섬세한 대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문장 뒤에 숨어 있는 여러 느낌이나 미묘한 감정을 적절하게 녹아낸다. 소설을 나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더 자세히 보이고 좀 더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다. 프랑스와즈 사강의 소설은 처음이었다. 잠시 읽어보니, 그 느낌이 섬세하며 미묘한 남녀 간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듯했다. 이는 미술 그림을 보는듯하기도 한데, 가령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면 그림의 배경만을 봐도 쓸쓸함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듯, 배경의 묘사나 대화의 단면으로도 남녀의 감정 상태가 머리에 그려졌다. 나는 미묘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이런 식으로 구성하는 것을 좋아한다. 정확한 형식과 틀에 맞춘 전형적인 구성이나 서사보다 이처럼 형식 밖에서 다소 즉흥적으로 구성되며 미묘한 감정을 대화나 배경 혹은 등장인물의 행동을 통해 은밀히 드러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 은밀하며 미묘한 감정을 따라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 곳곳에 묻어 있는 그들의 감정의 흔적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소설을 볼 때면 내 의식은 사소하게 표현된 배경이나 주인공의 시선이 머무는 것들 속에서도 어떤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끊임없이 표현되는 배경 속에서 주인공의 복잡한 마음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것을 발견한 나의 노력에 손뼉을 치기보다 이러한 글을 쓴 작가를 찬미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은 '율리시스'에 많은 수수께끼를 숨겨 두었기에 수 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길이다."라고 한 제임스 조이스의 예언이 이 책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토록 노력해서 책의 수수께끼를 발견함에 따라 그 책은 계속 읽히며 생명을 지속하게 된다. 그리고 그 노력으로 불멸이 되는 것은 그 책과 저자일 뿐이며, 그 책의 연구자는 자신의 노력보다도 저자의 천재성을 칭송하며 들러리를 자처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 교수가 또한 밥벌이하는 방법이다. 이는 또한 자신이 연구한 사람이 불멸이면 동시에 연구자의 업적 또한 다른 연구자와 독서가들이 인용함으로써 불멸이 된다. 불멸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불멸이 될 작품 중에 비교적 최근의 것 중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릴 작품을 연구하라. 그 작품의 명성이 높아지는 만큼 당신의 명성도 높아지리라.)
책을 읽으며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이는 마치 채연(아이즈원)이 다른 이의 춤을 보고 섬세한 몸짓으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같은 춤을 추는 것과 같았다. 그녀가 오로지 다른 이의 춤만을 보고 있었다면 그녀는 그렇게까지 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다른 이의 춤을 보고 따라 하며 나아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들고 수정하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모두가 인정하는 춤꾼이 된 것이다. 좋은 글을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읽기만 해서는 마치 다른 사람의 춤을 감상하는 정도로밖에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춤이 왜 다른 이들과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알려면 많이 보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처럼 독서에서도 그런 생각하기가 필요하며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따라 하기를 해봐야 한다. 거울에 나를 비추듯 좀 더 완벽해지기 위해 수정과 노력을 거듭해야 하며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기 위해 나만의 스타일을 체득해야 한다. 글쓰기 역시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글을 보고 따라 써 보고 그것을 자신의 스타일로 달리 써보고 자신만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모로 수정해보는 것이 바로 다독, 다상량, 다작의 궁극적인 비결이다. 그래서 그 작고 여린 그 소녀가 무척이나 존경스럽다. 존경을 넘어 찬미한다. 때에 따라선 대용네 강아지가 내 스승이고 부처이듯 그녀 역시 내 고마운 스승이며 부처이다.
글을 쓸 때나 노래를 부를 때나 혹은 무언가를 꾸준히 노력할 때면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춤이 떠오른다. 그녀의 머리카락마저도 완벽한 춤 일부라는 것을 깨달을 때면, '나르서스 호의 검둥이'의 서문에서 작가 조셉 콘래드가 말했던 "미천하게라도 예술의 조건을 갖추기를 열망하는 작품이라면, 그것은 매 줄마다 정당화되어야 합니다."라는 예술론이 떠오른다. 그녀는 적어도 내 시각에는 그러한 예술의 조건에 부합하며 그것은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에도 심어져 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춤으로도 감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녀의 행위가 관념의 세계 속에서 내가 추구하는 예술과 밀접하게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광기라고도 부를 수 있는 열렬한 몰입과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연과 필연,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이다. 그녀가 휘젓는 머리는 그녀의 의식과 필연의 영역에 그로 인해 찬란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머리카락과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은 무의식과 우연의 영역이다. 이런 찬란한 예술은 적어도 그 시간 동안 그녀의 모든 의식이 한곳에 집중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나의 예술은 그녀만큼 노력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녀는 스승이며 동시에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