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을 연다

기억의 문, 그리고 화해

by 정언

직장을 그만두면서 서재에 꽂아 두었던 소설들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처음 손에 든 책은 임영태 작가의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이다. 특별히 생각나는 내용은 없었다. 다만, 제목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작품이라 제일 먼저 손이 갔고, 두 번째 대문을 열어 보고 싶기도 했다.

소설을 한참 읽어도 아홉 번째 집과 두 번째 대문이 무엇이길래 나를 이렇게 끌어왔는지 궁금증만 더해갈 뿐이었다. 소설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 나는 멈추었다. 주인공이 아버지에 대한 뒤죽박죽인 기억의 조각들을 끌어내는 대목에서였다. 내가 결혼하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신, 까마득히 잊고 살아온 아버지를 기억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에게 느꼈던 따스한 기억은 다섯 살 무렵에 머물러 있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새로 샀고 엄마도 환하게 웃었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동네 노점으로 가서 멍게를 사 주었다. 우리 세 가족이 행복했던 기억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어색하지 않게 웃었던 기억으로는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사진첩을 보면 초등학교 운동회와 졸업식에서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지만 그때는 이미 아버지에 대한 불편함이 자라던 시기였다. 그 이후 아버지는 내 삶에서 늘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경제적 무능력과 술주정, 그리고 엄마와 늘 다투는 목소리가 한 덩어리가 되어 내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 나는 친정에서 자지 않고 신혼집으로 가버렸다. 기분 좋아 마신 술이었지만 아버지의 취한 모습을 보는 순간 그 집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신혼집에 자리를 잡자마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울지 않았다.

엄마와 함께 살게 되면서 갈등이 커지고,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 보일 때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심각한 일탈을 어쩌면 엄마의 성격이 부추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참 닮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용서하기는 싫었다.


두 번째 대문을 열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바라보던 나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가라앉아 있던 눈물이 올라왔다. 여느 아버지들처럼 딸자식의 다정한 말과 웃음을 기다렸을 것이다. 밥상머리에서 눈을 내리깔고,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피해 가는 철없고 미숙한 딸 때문에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 손 내밀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외면'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며 비껴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 사람으로서 아버지의 삶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다시 만날 수 없으니 기일을 챙기는 것으로 도리를 다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용서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와 화해를 해야 한다. 아버지의 일탈이 나를 불행하게 하고 내 삶을 힘겹게 한다고 여겼던 피해 의식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딸이었는데 왜 아버지 손을 잡지 않았는지,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서도 내 비좁은 소갈머리로 아버지를 밀어냈는지. 용서가 아니라 화해를 해야 하는데, 긴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어릴 때 열이 펄펄 나서 주사 맞고 돌아오던 날 아버지는 나를 업어 주었다. 직장에 나가고 자동차를 운전하면서도 나는 아버지를 한 번도 태워 드리지 않았다.


두 번째 대문을 열고, 아버지를 만난다.

기억의 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