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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잇독 Nov 23. 2018

무협지는 백해무익하다

중2병으로 대표되는 시기. 겁 없는 중2들 때문에 무서워서 북한이 못 쳐들어온다는 그 중2.

중학교 2학년 때, 동네 아는 누나가 (기껏해야 그 누나는 22살이었다) 나에게 '무협지는 백해무익하다'라고 말했다. 유익한 고전 문학이나 좋은 책을 읽으라는 말이었다. 


그때 당시 내 또래들은 이문열의 삼국지나 초한지, 퇴마록 등에 심취해 있을 시기였다. 삼국지 3번 읽지 않은 사람하고는 대화도 하지 말라’는 마케팅의 피해자 한 사람으로서 나도 10권짜리 삼국지를 2번이나 읽는 쾌거를 거두었다. 뭐 재미는 있었으니 안 읽은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어차피 나는 딱히 무협지에 흥미를 갖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퇴마록은 꽤 재미있게 시작하긴 했지만, 고작 2권에 접어들면서 싫증이 나기 시작해 덮어버렸다. 해리포터 시리즈도 1권을 넘긴 게 전부였다. 무협지가 재밌지 않은 이유는 싸움 장면에 대한 묘사가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작 중학생이 보기에도 말이다. 반면 무협 만화책은 좋아했다. 아마도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장면을 활자만을 통해 상상하는 것이 나에겐 안 맞았나 보다. 어찌 됐든 그 당시 중 2가 보기엔 훨씬 어른이었던 22살 동네 누나는 무협지는 백해무익하니 볼 필요가 없다는 게, 나름 어른으로서 청소년에게 해주는 조언이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침 무협지를 딱히 좋아하지 않던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야 말았다.


시간이 흘러 고3이 되었고 수능 준비에 여념이 없이 문제집을 푸는 것에 온 시간을 쏟던 때였다. 당시엔 매달 수능을 대비해서 학교에서 한 달에 한번 모의고사를 칠 수 있는 시기였는데, 어느 달 모의고사에 언어 영역 난이도가 매우 높게 나왔었다. 특히 매우 어려운 사자성어 문제가 나왔는데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단어였다. 공부를 좀 한다는 친구들도 전부 틀렸고 쉬는 시간에 서로 답을 맞혀 보는데 우리 반 전체 학생이 다 틀린 문제로 여겨졌다. 그런데 딱 한 명, 우리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던, 전교에서도 1,2등을 다투던 친구가 무심하게 말했다.


“응? 이거? 무협지에 엄청 많이 나오는 단어인데?”


4년 전 동네 누나의 말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배신감. 백해무익이라니요? 백해무익은 아니잖소!


1등인 그 친구는 여러모로 매력적인 친구였다. ‘문무겸비’가 별명일 정도로 공부도 잘하고 검도로 다져진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 친구였다. 성품도 착해서 많은 이들이 좋아했고, 일본 게임을 좋아해서 일본어를 공부할 정도로 유흥도 즐길 줄 알았다. 수능을 한 달여 앞두고 일분일초가 아까운 그때에, 쉬는 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는 줄 알고 봤더니 게임 때문에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던 장면이 기억난다. 결국 그 친구는 수능 시험에서도 우리 학교 전교 1등을 차지했고 당당히 전국 상위 0.001%를 기록하였다.


결론적으로 무협지는 백해무익하지 않다. 여전히 무협지를 찾는 편은 아니지만, 아직도 20여 년 전처럼 만화를 즐겨보는데 웹툰을 보는 게 쏠쏠한 재미이다. 20년 전에는 일본 만화가 한국을 지배했지만 이제 한국의 웹툰 시장이 거대 성장한 것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은근히 천대받던 (?) 만화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변화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무협지나 만화, 게임을 인간의 유흥과 스트레스 해소, 취미활동, 상상력과 창의성의 증가라는 측면에서 보면 결코 해로울 것이 없다. 단지 학벌이나 자격증이 아니어도, 여러 분야에 흥미와 전문성을 갖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그런 사람들이 인정받는 사회로 조금은 변화되고 있는 것 같아 내심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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